인간 심리에 관한 연구로 원숭이와 바나나 실험이 있습니다. 종종 관습이나 고정 관념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해 인용되는 실험이기도 합니다. 실험은 원숭이를 굶긴 후 사다리 위에 바나나를 두고, 바나나를 먹으려고 사다리에 오르려는 원숭이에게 차가운 물을 퍼붓습니다. 반복적으로 사다리 위의 바나나를 먹으려는 원숭이에게 찬물을 퍼붓다보면 원숭이는 사다리 위의 바나나는 먹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렇게 여러마리의 원숭이에게 반복적인 학습을 시킵니다. 한 마리라도 사다리 위의 바나나를 먹으려 하면 모두에게 찬물을 끼얹습니다. 이런 경험을 집단적으로 한 무리의 원숭이들은 아무도 사다리 위의 바나나를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다리 위의 바나나를 먹으려 하면 찬물을 맞는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무리 속에 학습되지 않은 원숭이를 참여시키면 이 굶주린 원숭이는 사다리에 있는 바나나를 먹으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이 때 학습된 다른 원숭이들이 학습되지 않은 원숭이를 공격합니다. 찬물을 맞지 않겠다는 행동 양식이 생긴 탓입니다. 그래서 사다리 위의 바나나는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새로운 구성원에게 학습을 시키는 것입니다. 사다리 위로 올라가더라도 찬물을 퍼붓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마침내 원숭이 무리들에게는 사다리 위의 바나나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규범이 생깁니다. 사다리 위의 바나나를 먹으려고 하다 찬 물벼락을 맞고 학습된 원숭이들을 무리에서 다 빼내고 찬물 세례를 맞은 적이 없는 원숭이들만 남기더라도 이들 원숭이들은 아무도 사다리 위의 바나나를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다리 위의 바나나를 먹으려하면 찬 물벼락을 맞게 된다는 믿음과 규범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경험한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관습의 나쁜 면, 즉 반복적으로 이어져 온 공동체의 부정적인 부분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됩니다. 과거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 무턱대고 이어받아서는 안된다를 강조하면서 공동체의 오래된 전통과 가치를 부정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새로운 가치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공동체의 오랜 관습은 이겨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실험에서 봐야하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인위적인 학습입니다. 상관 관계가 거의 없는 일을 만들어 놓고 반복적으로 학습을 통해서 거짓된 믿음이나 신념이 생겨나게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거짓이면서 자연스럽지 않은 일들이 참이 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부분 말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말을 묶어 사용합니다. 우리가 사는 경제체제, 사회구조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말입니다. 근데 자유와 평등은 함께 묶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자유와 평등은 반대말에 가까운 말이기 때문입니다. 평등을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가 훼손될 수 있고, 자유를 위해서는 만인의 평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그렇게 바라고 노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이 다수의 행복과 평안을 말해왔음에도 다수는 여전히 불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대결,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 기축통화의 위기 등은 익숙했던 패러다임의 변경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변화의 과정에서 불안과 초조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트들이 만들어 놓은 계획된 경험 속에 우리는 늘 지는 선택을 해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서로 응원하며, 긍정적인 영향을 나눠왔던 자연스러운 민중의 삶이 소수의 엘리트들을 위한 의도된 학습으로 왜곡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언론, 학술, 경제 우위, 힘의 우위 등으로 의도되고 조작된 학습에 대한 바른 이해를 준비하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도우며 서로의 인생을 지지하고, 함께 하는 자연스러운 우리들의 삶. 더 힘을 내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