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엘리트들은 영화를 오랫동안 정치적 투쟁도구로, 사회 의식의 통제 수단으로 사용해왔습니다. 때로 비서구권 국가에 대한 자국의 우위를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서구에 맞서는 세력을 비하하는 수단으로도 사용했습니다. 영화 속 강력하고 정의로운 미국이라는 모습을 투영시킴으로써 비서구권 대중들에게 왜곡된 이미지를 강조해 오면서 말입니다.
람보나 코만도로 대표되는 미군의 상징적 강함이 이를 대표합니다. 현실 전쟁에서 람보나 코만도는 전투력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큰 덩치는 쉽게 표적이 될 수 있고, 크고 육중한 몸이라 상대적으로 민첩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는 무적임을 자랑합니다. 미국의 강함을 상징해야 하니 말입니다.
지구촌의 전쟁사를 다룬 헐리웃 영화들도 대부분 미국의 힘과 정의로움을 다룹니다. 그 어느 역사의 기록보다 더 승자의 관점에서 쓰여진 전쟁역사를 바탕으로 서방 세계의 정의로움,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힘과 정신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화를 본 우리는 미국이나 서방의 특수 부대에 대한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헐리웃 영화를 통해 미국과 서방의 군사적인 힘을 쉽게 믿어왔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때로 그들은 그들의 정의로움을 위해서 약자(弱者)를 악자(惡者)로 만드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슬람은 모두가 테러리스트라고 인식할 정도로 이슬람 세계를 악의적이고 끈질기게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후세인, 카다피가 건재하던 시기, 이라크와 리비아의 국민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았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까지 이뤄졌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서방의 미디어는 후세인과 카다피를 장기집권의 후안무치 독재자로 정의해 왔고, 우리는 그들의 말을 의심치 않고 믿어왔습니다.
우리는 서방 세계의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를 통해 이슬람 국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자연스럽게 가져왔고, 후세인과 카다피에 대한 오해를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진실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말입니다. 장기 집권을 이유로 독재자라는 정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이들 나라의 국민들이 독재자에게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 착각하며 말입니다. 서방 기업들에게 사유화되었던 유전을 찾아 국유화로 전환시키고, 그 수익으로 국민들의 삶을 개선시켰던 그들의 역할과 업적은 외면하면서 말입니다.
헐리웃이 중심이 된 미국의 영화산업은 대중을 즐겁게 하고, 이윤을 제작자에게 제공하는 수단인 동시에 서구를 과장하거나 비서구권을 매도하는 선전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재미의 요소로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철저하게 서방 엘리트의 입장을 대변해 왔으며, 반서방 세력을 서방의 입장에서 매도하기를 반복해 왔기 때문입니다. 러우전이 전개되는 이 시기에도 서방의 미디어는 반서방의 선봉에 있는 푸틴을 독재자로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헐리웃은 20세기말과 21세기초 러시아 정치상황을 다룬 영화 크렘린의 마법사(The Kremlin Wizard)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구에서 피에 굶주린 독재자로 묘사되는 푸틴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참담했던 과거 러시아의 현실을 이겨내고 다시 러시아를 강국으로 이끈 그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영화 대본은 2022년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이태리 작가 줄리아노 다 엠폴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줄거리는 1990년대에서 2010년대 중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젊은 TV 프로듀서 Vadim Baranov가 나중에 대통령이 될 야심 찬 KGB 요원 푸틴과 협력한다는 줄거리입니다.
원작소설은 2022년 4월에 나온 작품으로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이태리어로 출판된 뒤 프랑스로 전해져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랑스에서는 40만 부가 팔렸고, 더 많은 사본이 인쇄되고 있다고 합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작품 속 러시아인과 푸틴 대통령 모두가 매우 좋은 사람들로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이 소설은 러시아에 대한 헐리웃의 진부한 시각, 반대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기존의 방식과 다른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영화 크렘린의 마법사는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애국적인 정치인 푸틴과 푸틴의 나라, 러시아에 관한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전망입니다. 기존의 헐리웃의 역사관, 미국과 서구 사회의 시각으로 접근했던 방식과는 다른 영화가 제작, 배급될 것으로 보입니다. 반서방의 지도자들을 비난하고 깍아내리기 바빴던 헐리웃의 제작 공식을 깨고 말입니다. 푸틴을 연기할 배우는 쥬 드로(Jude Law)입니다.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세상을 단극으로 이끌던 미국과 서방, 그리고 단극화의 나팔수였던 헐리웃에서 기존과 다른 시각으로 만들 영화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단극화가 다극화로 변모해 가는 세상의 변화, 즉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러우전이 끝나면 우리는 세상의 변화와 그 움직임의 방향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엘리트들에게 속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남성 평균 수명이 오십대 후반이었던 러시아의 암울했던 20세기 말의 상황을 이겨내고 다극화의 한 축으로 성장한 러시아를 이끌고 있는 푸틴. 그런 푸틴이 헐리웃 영화 속에서 크렘린의 마법사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푸틴의 곁에는 위대한 러시아인들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이순신 장군 곁에 위대한 한민족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지켜왔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공격하는 외세에 저항할 줄 알았습니다. 서구가 우리에게 씌어놓은 오랜된 색안경을 벗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쉽게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세계화에서 다극화로의 전이가 시대정신이라면 엘리트 중심의 세상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세상으로 전이되는 것도 시대정신이 될 것입니다. 정보 접근성이 좋아진 세상, 더 똑똑해진 우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엘리트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사고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거친 자연에서 협력을 통해 살아왔던 오래된 지혜와 함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