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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2025년, 그리고 미디어

by 할수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1980년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서 바꾸고 싶은 것이 참 많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나간 시간을 무작정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역시 옳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서 항상 옳음이나 항상 그름이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군부독재같은 선악이 명확한 사안은 예외이지만 말입니다.


누구는 옳다 말하고, 누구는 그르다 말하지만 결국 어느 선에서 협의를 이루고 살아온 것이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오래된 지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관습같은 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음과 나쁨을 가리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1983년 교복자율화가 있었습니다. 교복자율화란 1983년 교육부가 중고등학생들이 교복 대신 자유롭고 간편한 복장을 할 수 있도록 한 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율화 이전에는 서울, 지방 구분없이 전국의 모든 중·고등학교가 동일한 디자인의 교복을 입었습니다. 영화 말죽거리의 잔혹사에서 보이듯 말입니다. 그런 통제되고 획일적인 교복이 학생 개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을 무시한다는 지적과 일제의 잔재 청산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었습니다. 자율화는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책임의식을 기르는 등 교육적인 효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복을 입음으로써 유해 환경의 노출로 인한 탈선 증가, 빈부격차로 인한 위화감 조성, 사복 구입에 따른 가계 부담 증가 등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한다는 여론도 높았습니다.


1986년에는 교복자율화의 부정적인 영향에 따라 자율화를 폐지하고 교복착용을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많다는 의견을 수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생 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을 무시하고, 통제되고 획일화된 경직된 사회를 만든다는 단점에도 말입니다.


통제되고 획일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창의성은 발휘되기 어렵습니다. 저마다의 개성보다는 전체의 기준을 따르다보면 사고가 창의적이기보다는 경직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자율(自律)의 반대는 타율(他律)입니다. 타율은 자신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타인의 명령이나 부탁을 움직이는 수동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타율적인 세상보다는 자율이 강조되는 세상이 훨씬 더 역동적이고 희망적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2025년, 드높은 개인의 창의와 자율, 개성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상이며 권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교복자율화를 완전 시행한지 40년이 다되어가는데 아이들의 복장은 교복자율화 이전 획일화된 교복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브랜드, 가격, 재질 등 세부적인 것에서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대부분 똑같기 때문입니다. 교복자율화의 시대임에도 획일화된 교복통일시대가 바로 우리들의 사는 세상입니다.


같은 세대의 동질성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개성보다는 남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아무래도 자율과는 거리가 먼 타율이기 때문입니다. 탈산업화 시대에 요구되는 것이 창의성이라면 이는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닐테지요.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교복자율화 시대임에도 교복이 통일된 시대라는 모순적인 세상 말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무작정 잘못되었다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이런 모순에 대해 대중예술, 대중문화, 그리고 이들을 매력적으로 전파시키는 미디어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보면 될까요. 그리고 일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미디어를 다루는 세력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통제하지 않는데 통제되고 있는 세상은 분명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무작정 부정적으로만 봐서는 안된다는 생각합니다만 자연스럽지 않음에 대해 한 번 쯤 생각해보자는 의미입니다.


1980년, 과거를 되짚어 보는 영화라면 생각의 나래를 한 번 펼쳐볼 수 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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