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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인연과 추억 1

by 윤기환


중학교 2학년이 되던 이른 봄날, 이웃에 사는 고종사촌 형이 나에게 새 학기 선물이라며 건넨 것은 예쁜 하모니카였다. 그 자그맣고 앙증맞은 하모니카를 내 손에 쥔 것은 어린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름만 듣던 하모니카를 보고 만지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럽고 행복했다.


그렇게 우리의 낯선 인연이 시작되었다.


형은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를 찾아 부는 법 정도를 내게 알려주었지만, 그 이상은 형도 잘 모르니 열심히 연습해 보라 했다. 처음 접하는 하모니카는 어린 나에게 강한 호기심을 주었지만, 쉽게 접근을 허락하진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대로 불어보기도 했지만, 삑~삑~ 거친 쇳소리만 지를 뿐, 낯선 친구는 쉽게 곁을 주지 않았다. 도대체 어찌해야 이 친구와 친해질 수 있을지 막막했다. 지금은 맘만 먹으면 인터넷, 유튜브에서 연주법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겠지만, 누구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던 시절, 혼자서 들숨 날숨을 반복해 보았지만 음계를 정확히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가 정확히 잡히면서, 우리는 서로 낯을 가리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새로운 친구, 하모니카와 놀며 봄이 다 갈 무렵, 내가 처음으로 악보 없이 부른 노래는 베일리의 '그 옛날에'와 독일민요 번안곡인 '노래는 즐겁다'였다.


옛날에 즐거이 지내던 일/ 나 언제나 그리워라/ 동산에 올라가 함께 놀던/ 그 옛날의 친구들....


(도도레 미미파 솔라솔미/ 솔파미레 파미레도/ 도도레 미미파 솔라솔미/ 솔파미레미레도....)


노래는 즐겁구나 산 너머 길/ 나무들이 울창한 이 산에/ 가고 갈수록 산새들이 즐거이 노래해.....


(도레미 미솔파 파라솔 솔파미/ 솔솔파 미미솔 파파레솔미/도미레미파레 미파솔솔 라라도시라솔..,,.)


이 두 노래는 당시 중학교 2학년 음악 책에 있던 노래였다. 이 곡을 제일 먼저 부르게 된 것은 계음의 높낮이가 크게 변하지 않아 들숨날숨으로 부는 하모니카 계음 연습에 딱 좋은 곡이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노래가 되어 울려 퍼지는 하모니카 소리가 너무 좋았다. 기쁜 마음에 형에게 달려가 자랑삼아 하모니카를 불었다. 형의 힘찬 박수가 나를 더욱 신나게 했다.


하모니카와 낯설지 않은 인연은 계속되었다.


여름방학이 오고, 학교 갈 부담이 없어지면서 하모니카와 더욱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왔다. 틈만 나면 음악책을 펴 놓고 계이름을 외우며 하모니카를 불었다. 한곡 한곡 완성해 가는 재미가 어린 가슴을 흥분시켰다. 어떤 날은 몇 시간씩 불다가 입술이 불어 터지기도 했다. 그해가 다 갈 무렵, 당시 국민학교에 다니던 두 동생 음악책에 있는 노래까지 거의 다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중3이 되면서 고교 입시 준비로 하모니카를 한동안 잊어야 했다. 책과 씨름하며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으나, 뜻밖에도 고입 무시험 제도가 공표되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교육정책에 부모 세대는 분노했지만, 공부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대부분의 학생들은 환호했다. 얼떨결에 책에서 자유로워진 나는 잊고 있던 서랍 속 하모니카를 다시 꺼냈다. 그렇게 다시 만난 하모니카는 나와 더욱 친한 친구가 되었다. 어느 순간,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를 악보 없이 불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너무도 신기한 일이었다. 계이름을 몰라도 음을 따라 불면, 조금은 서툴지만 노래가 되었다. 그동안 계음을 짚어가며 한곡 한곡 부르던 경험이 축적되면서 은연중에 음감이 생긴 것이었을까? 지금도 그때의 신선한 충격은 잊을 없는 전율로 남아있다.


그렇게 하모니카에 재미를 붙이던 어느 날, 급기야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동안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하모니카 구멍에 먼지가 잔뜩 끼어있는 것을 본 것이 사고의 발단이었다. 나사를 풀어 물로 씻고 먼지를 제거한 후 다시 조립했다. 이제는 더 맑은 소리가 나올 것을 기대하며 불었는데, 음이 떨리며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형에게 달려갔다. 형은 내 얘기를 듣고 하모니카를 불어보더니, '청소한다고 리드(떨림판)를 건드려 음이 변한 것'이라 했다. 안타깝지만 하모니카로서 기능은 끝이 났다고도 했다. 더 깨끗이 하려고 칫솔로 리드를 박박 문지른 나의 무지가 하모니카를 망쳐버린 것이다. 당혹스럽고 울고 싶었다. 그때가 중학교 3학년 말쯤이었다. 고입 무시험으로 공부 부담에서 벗어나, 함께 할 시간이 많아진 시기에 안타까운 이별의 순간이 온 것이다. 약 2년 간 쌓아온 우리의 우정은 어이없는 나의 실수로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준 하모니카와 결별은 쉽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미안한 마음에 하모니카를 버리지 못하고 서랍에 넣어 두었다. 가끔씩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어 보기도 했지만 한 번 돌아선 하모니카 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 그 친구와 완전한 결별을 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고등학생 시절에는 더 이상 하모니카 친구는 내 곁에 없었다.


이후 안타깝게도 나는 오랜 세월 하모니카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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