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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몬해협 해안도로를 달리다

by 윤기환


시모노세키의 아침


선내 방송과 함께 눈을 떴다. 이미 날은 밝고, 배는 시모세키 항구에 정박해 있다. 낯선 잠자리였음에도 쌓인 피로를 털어낼 만큼 푹 잔 것처럼 몸이 가뿐하다. 다행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목욕탕에서 새로운 하루를 준비한다.


하선을 하고, 낯선 땅을 밟는다. 설렘을 밟는다. 어제 부산항 터미널에서 만났던 스무 명의 라이더들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다시 모였다. 어제 잠시 잠시 나눈 대화로 조금은 익숙한 얼굴들이다. 서로 인사를 하며 조금씩 낯섦을 지운다. 셔틀버스에 짐을 싣고, 라이딩 준비를 마쳤다.


시모노세키의 아침 하늘은 금세 비라도 퍼부을 듯 잔뜩 흐려 있다. 아침 공기가 무겁고 축축하다. 구름은 낮게 깔렸고, 하늘은 마치 잿빛 유리를 덮어놓은 듯하다. 동녘 해가 언뜻언뜻 구름 사이를 비집고 존재를 알리려 하지만, 짙은 구름에 눌려 희미하다.


9시가 조금 넘었다. 바다도 하늘빛을 닮아 잔뜩 찌푸려 있다. 파도가 거칠게 방파제를 때린다. 간몬해협을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스무 명의 라이더들이 일렬로 늘어서 천천히 첫 페달을 밟는다.

간몬해협 해안도로

빗길 라이딩


잔뜩 찌푸리던 하늘이 부슬부슬 비를 뿌린다. 얼굴에 미스트를 뿌리 듯 부드러운 보슬비가 그리 싫지는 않다. 선글라스에 뿌연 안개가 서린다. 안경을 벗으니 시야가 확 트인다.


도시를 조금 빠져나오니 바람까지 거칠어지며 바다 냄새가 진하다. 조금 더 센 비바람이 뺨을 스친다. 그래도 이 정도는 참을 만하다. 국토종주를 하면서 숱하게 겪은 일이다. 더 이상 빗줄기가 굵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페달을 밟는다.


어느새 인적이 드물어지고, 도로는 여전히 바다를 따라 달린다. 오른쪽으로는 낮은 산과 집들이 이어지고, 왼편으로는 파도를 품은 바다가 따라오며, 때론 거칠게 때론 잔잔하게 물결치며 부서진다. 바다는 도로와 오래전부터 사랑에 빠진 듯, 서로 안아주고 보듬어주며 정답게 달리고 있다. 그 길을 따라 스무 명의 라이더들이 길게 줄을 지어 행복을 만들어 가고 있다. 가는 비는 그칠 줄 모른다.


191호선 국도, 위험한 동행


우리가 달리고 있는 길은 국도 191호선(R191)이다. 이 도로는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시작해 히로시마현 히로시마 시청 앞까지 이어지는 총길이 284.1 km의 국도다. 다차선 도로가 도시를 벗어나면서 편도 1차선 도로가 된다. 국도라고 하기엔 다소 무색할 정도로 길이 좁고 갓길도 관리가 덜 된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차량도 늘고 있다. 특히, 육중한 트럭이 빠르게 스칠 때면 온몸이 오싹하는 전율을 느낀다. 갓길은 듬성듬성 나타나고,, 비 마저 내려 젖은 도로를 달리는 라이딩은 참으로 위험한 동행이다. 모두 베테랑 라이더들이지만, 쌩쌩 달리는 차량들로 주눅이 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수신호와 고함소리로 서로의 안전을 지키며 달린다. 라이더들의 끈끈한 우정이 함께 달린다.


191호선 국도 라이딩


나를 돌아보다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린다. 도로가 젖으며 미끄럽다. 바다를 따라 달리던 도로가 산속으로 들어간다. 업다운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힘이 들기 시작한다. 늘 그렇듯이 지금부터는 나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나 자신과 대화를 시작한다.


살아오면서 숱한 고개를 넘고 넘었지만, 오늘도 나는 여전히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고 있다. 퇴직을 하고,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져 가면서 치열했던 삶의 굴곡을 조금은 덜 느끼는 듯도 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가파러지다가 언젠가는 더 이상 넘지 못할 고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네 삶을 똑 닮은 길을 따라 페달을 밟는다. 평평한 길이 나오는가 싶더니 또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까마득히 먼 고갯마루를 바라보며 심호흡 한 번 크게 한다. 저 고개를 넘으면,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폐부까지 깊이 스며드는 내리막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을 위해 노를 젓듯이 묵묵히 페달을 밟는다.'나의 외로운 항해'는 계속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바퀴 위에서 오늘을 헤쳐나가는 나를 조용히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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