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가 밀려오는 해거름. 유멘온천 마을에 도착했다. 거의 100 km를 달려온 스무 명의 동료 라이더들이 하루치의 행복과 피로를 안고, 서로를 향해 안도의 미소를 던진다.
짐을 풀고, 누구라 할 것 없이 온천탕으로 향한다. 종일 달려온 몸이 눈 녹듯 풀리며, 행복이 실핏줄을 타고 스멀스멀 스며든다. 어쩌면 몸 보다 마음이 먼저 풀리는 것일 게다. 오늘 하루를 함께 한 비와 바람, 땀과 피로, 동료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산과 바다와 들녘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이곳 유멘온천은 오랜 역사와 전설을 지닌 지역이다. 약 1,200년 전, 사슴이 다친 다리를 치유하기 위해 온천에 몸을 담그는 것을 목격한 후, 온천을 발견했다는 전설이 재밌다. 이곳 온천은 염분을 포함한 물이 신경통, 피부 질환, 냉증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오랜 세월 '치유의 휴양지'가 되어왔다 한다. 유멘(湯免)이라는 지명도 '온천으로 병을 치유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오래전 도쿄에 출장을 갔을 때, 일본의 대표적인 유황 온천 지역인 하코네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 비하면 지극히 소박하고 작은 마을이지만,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포근함이 오히려 정겹다. 날이 저물면서 고즈넉함이 흐르는 마을은 따스한 온천물처럼 오래된 온도를 유지한 채 어둠에 갇히고 있다.
료콴(旅館) 1층 앞마당에 자리한 자그마한 정원이 아름답다. 1,0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정원 문화는 인공적인 장식을 피하고 자연경관을 강조하며, 자연과 철학적 사상을 담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한다. 한 바퀴 둘러보고 소파에 앉아 차 한잔 즐기며 통창 너머로 바라보는 정원이 하루의 피로를 덜어준다.
식당에는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 있다. 한결 가벼운 몸으로 모인 자리가 시끌벅적하다. 종일 함께 한 라이더들이 이제는 익숙한 얼굴이 되어 서로 술을 권하며 왁자한 웃음으로 만찬을 즐긴다.
객실에 돌아와 다다미 방에 드러눕기 무섭게 열혈청춘 아우들이 문을 두드린다. 이국 땅 외진 마을의 첫날밤을 그냥 자도록 놔 둘 아우들이 아니다. 국토종주를 하면서 함께 한 숱한 날이 그랬듯이, 이미 방에는 준비한 소주와 맥주가 차려져 있다. 부산과 양산에서 온 라이더 넷도 자리에 함께 했다. 술잔에 정(情)을 담아 돌리니, 술이 정이 되고, 정이 술이 되어 돌아간다. 자리가 얼큰해질 무렵, 내가 준비해 간 하모니카로 '섬마을 선생님'을 불어 분위기를 띄웠다. 술에 취해 박자도 엉망이었지만, 모두들 앙코르를 외친다. 부딪히는 술잔, 하모니카 선율과 함께 정이 흥건하게 흐르는 유멘의 밤이 소란하게 깊어 간다.
모두가 흩어진 유멘의 밤은 다시 고요하다. 다다미 방에 담요를 깔고 길었던 하루를 내려놓는다. 안도감과 평온이 밀려온다. 오늘 온종일 달려온 길 위에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전부였지만, 이렇게 멈추고 잠시 쉬어갈 수 있음은 여행의 또 다른 맛이다.
길었던 하루가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