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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하기마을, 하기성(萩城)

by 윤기환

바다를 따라 가는 길 옆으로 듬성듬성 마을이 지난다. 집 마당엔 빨래가 마르고, 장작더미가 수북히 쌓여있고, 강아지 한 마리 하릴없이 졸고 있다.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낡은 버스가 무심한 듯 덜컹덜컹 마을을 지나고, 가끔씩 자전거를 탄 노인들이 스친다. 한가로운 농촌 풍경은 우리네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바닷물이 유입되는 작은 강을 따라 일본 전통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 보인다. 바다와 산이 손을 잡은 자락에 시간마저 숨을 고른 듯 조용한 마을. 일본의 에도 시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하기 마을에 도착했다.

강을 따라 낮은 산허리에 빼곡히 자리한 가옥들이 낯선 여행객을 정감 있게 반긴다. 마을 앞에는 작은 선착장이 있고, 나룻배 몇 척이 바다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소박하고 정겹다.


하기마을 입구 풍경


마을 입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두 바퀴의 행렬은 하기성을 향한다. 하기 마을은 몇 백 년 전에 조성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바둑판처럼 길이 잘 정돈되어 있다. 흙담과 백색 회칠 담장, 검은 기와가 잘 어우러진 가옥은 아름답고 정갈한 건축미를 보여준다. 마을은 계급에 따라 무사, 상인, 장인의 거주 구역이 나뉘어 지어졌다 한다. 오랜 세월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 부러움으로 다가온다. 한 무리의 외국인 관광객이 자전거를 타고 길을 지난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여행객끼리 손짓으로나마 반가움을 표한다. 서양인의 눈에는 이곳의 풍경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사뭇 궁금하다. 아마도 전혀 다른 문화에 대한 생경함이 우리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하기성(萩城) 입구에 도착했다. 하기성의 성주였던 인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이다. 그는 하기성의 창건자이자, 일본 전국시대와 에도시대를 잇는 과도기의 중요한 다이묘(영주)였다. 모리 가문 후손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메이지 유신의 주도 세력 중 하나가 되며, 우리가 잘 아는 이토 히로부미(일본 초대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군사 개혁자) 등 일본 근대 정치를 이끈 인물들을 다수 배출했다 한다.


성 입구에는 그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고, 올해 서거 400주년 기념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자전거로 30여 분 성내를 천천히 돌았다.


하기성 정원과 성을 품은 바다

허물어져 일부만 남은 성곽이 긴 역사의 시간을 품고 바다를 바라보며 길게 누워있다. 성곽 위로 따가운 햇살이 사뿐히 내려앉아있다. 성곽 위에 올라 드넓게 펼쳐있는 바다를 본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 사위가 온통 고요하다. 바람 스치는 성곽을 따라 동료들과 함께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걸으니 먼 옛날 이 길을 걸었던 사무라이들의 발자욱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소리를 따라 걷는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잘 가꾸어진 숲과 연못, 산책길이 천천히 따라온다.


잠시 둘러본 하기마을과 하기성은 시간을 멈춘 듯 살아있는 역사를 온몸에 품고, 오늘도 이곳을 찾는 후세들의 발자국 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다.

하기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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