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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고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by 윤기환

아키요시다이의 시간여행을 가슴에 품고, 또다시 길을 떠난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은 완만한 내리막과 오르막 길이 이어지면서 라이딩의 행복을 한껏 맛볼 수 있게 한다. 이 맛에 그 힘든 길을 달려온 것일 게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여기부터 숙소까지 가려면 오늘 최고의 난코스인 스무고개를 넘어야 한다며 가이드가 은근히 겁을 준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괴롭힌 고갯길이 아직도 스무 개나 남아있다니.....


스무고개와 라이더들의 자존심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으며 본격적으로 산을 넘기 시작한다. 한눈에 봐도 첩첩으로 둘러싸인 산이 아득하니 펼쳐있다. 고개 몇 개를 넘고, 또 몇 고개를 넘었다. 온몸에 묵직한 피로가 밀려온다. 잠시 쉬고 출발하려는데, 계속 뒤처지며 힘겨워하는 나를 선두에 서게 한다. 그러나 조금 달리다 보니 동료 라이더들은 이내 나를 스쳐 지나가고 만다. 나와 보조를 맞추며 함께 하던 열혈청춘 아우들 마저 의리를 버리고 달아나고 없다. 뒤를 돌아보니 따라오던 여성 라이더들도 없다. 스무 명의 라이더들이 함께 하지만, 지금부터는 오롯이 나와의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이틀 동안의 라이딩 중 이 길이 가장 가파르고 길다. 손이 저려오고 허벅지가 뻐근한 통증을 호소한다. 오르막 끝은 아직도 아득히 멀다.


임도를 따라 달리는 숲 길

라이딩을 하다 보면 오르막에서는 은근히 라이더들의 자존심 대결이 펼쳐진다. 가파른 경사일지라도 쉬어가거나 끌바(자전거 끌고 가기)는 용서가 안된다. 또, 뒤처지지 않기 위한 신경전도 은근히 펼쳐진다. 나 또한 그 자존심 대결을 모를 리 없지만, 오르막 경쟁은 포기한 지 오래다.


잠시 자존심을 내려놓고 쉬어가기로 했다. 앞서 달리던 라이더들은 길이 굽어지면서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물 한잔 마신 후, 털퍼덕 주저앉아 잠깐의 쉼을 갖는다. 무심하게 내리쬐는 한낮의 뙤약볕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라이딩을 하면서 힘이 들 때마다, 나는 늘 국토종주 길의 이화령과 낙동강 4재(박진고개, 다람재, 영아지고개, 무심사고개)를 생각한다. 국토종주를 해 본 라이더들은 이 외에도 복병처럼 숨어있는 난코스가 얼마나 많은 지를 안다. 그 힘든 길도 해냈으니, 어떤 길도 그리 두렵지는 않다. 다만, 뒤쳐지는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으면 된다. 잠시 내려놓은 자존심 덕분에 다시 밟는 페달에 힘이 들어간다.


저만치 빼꼼히 하늘이 보이고, 먼저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료들도 보인다. 마지막 젖 먹던 힘을 다해 오르니 동료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보낸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다. 이런 갈채는 난생처음이다. 손을 흔들어 답례하며, 마치 대회에서 1등이라도 한 라이더처럼 결승선을 끊었다. 자전거를 던져 놓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꼴찌에게 한 친구가 장난기 어린 농을 던진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출발합시다!!"


모두 한바탕 웃음으로 오늘 가장 힘들다는 고개를 무사히 넘은 행복을 함께한다.


가파른 임도의 오르막길

모내기 벌판과 익어가는 보리밭


얼추 스무고개를 다 넘고 나니, 마을이 보이고 벌판이 나타난다. 들녘 논배미에는 이미 모내기를 마쳤거나 준비하고 있는 논들이 많다. 우리나라도 지금 쯤 중부와 남녘에 모내기가 한창일 것이다. 훨씬 남쪽에 있는 일본이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모내기를 하고 있다. 조금은 의아했지만, 기후가 비슷하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길가 들녘엔 누렇게 익은 보리밭도 듬성듬성 보인다. 일본에서 보는 보리밭이 신기하고 정겹다. 모두들 보리밭으로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는다. 지금은 우리나라 들녘에서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보리 보기가 쉽지 않지만, 나 어릴 적엔 이맘때쯤 되면 너른 들녘엔 온통 누런 보리가 지천으로 깔렸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보릿고개를 넘기 힘든 척박한 농촌의 삶이 들녘에 넘실거리던 시절이었다.


보릿고개가 뭔지 알리 없던 어린 시절, 보리가 막 익기 시작하는 들녘은 우리들의 또 다른 놀이터였다. 동무들과 채 익지 않은 보리를 불에 구워 손으로 비벼 먹으면 그리 맛있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배가 고픈 하굣길, 소위 '보리밀대'라 하는 이 놀이는 어른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우리들만의 도둑놀이였다. 손과 입, 얼굴까지 씨꺼멓게 된 우리는 서로를 보며 신나게 깔깔대다가, 냇가에 가서 감쪽같이 흔적을 없애고 난 뒤, 아무 일 없었던 듯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보리밭에 들어서니, 바람결에 한들거리는 누런 물결이 먼먼 기억을 소환한다. 오늘도 뜻하지 않은 곳에서 추억 한 컷 떠올리고 간다.


어언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있다. 또 하루치의 행복과 추억을 담고, 우리의 행렬은 숙소로 향한다.


추억의 보리밭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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