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도시가 비에 갇혀 있다. 뿌옇게 드리운 안개가 빗줄기와 함께 도시의 아침을 깨우고 있다. 비 예보로 어제저녁부터 걱정이 많았는데, 날씨는 끝내 배신하지 않고 새벽부터 제법 많은 비를 뿌린 모양이다.
빗길을 달리는 버스
호텔 로비에 모인 동료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대표(가이드)가 모두의 의견을 수렴한다. 상황을 봐가며 빗길을 달리느냐, 아니면 라이딩을 포기하고 버스로 이동하느냐의 선택만이 남았다. 마지막 날 라이딩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커서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비가 그치지 않을 것이 확실한 날씨는 결국 우리 일행을 아쉬운 탄식으로 몰아간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도 빗줄기는 여전히 거세다. 끝내 라이딩을 포기하고, 자전거를 차량에 실어 보내야 했다.
시모노세키까지는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 한다. 얄미운 빗줄기는 거칠게 창을 때리며 흘러내리고, 버스 안은 침묵만이 흐른다. 모두들 차창만 바라보며 아쉬운 한숨을 토해낸다. 버스는 같은 듯 다른 풍경을 스치며 빗속을 달린다. 두 바퀴로 달려야 할 길을 네 바퀴 버스로 달린다. 원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마음을 내려놓으니 이 또한 행복이다.
가라또 시장
시모노세키 항구에 도착했다.
비는 여전히 도시를 적시고 있다. 배에 자전거를 싣고 난 후,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일행은 배에 승선하는 오후 6시까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점심때가 넘었으니 배를 채워야 한다. 우리 일행은 가라또 시장에 가기로 했다. 1909년 거리 장터로 시작하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시장은 특히 복어회를 비롯, 각종 스시와 초밥을 저렴하고 푸짐하게 팔고 있어 단순한 시장을 넘는 시모노세키의 관광 명소라 한다.
우산과 비옷을 챙겨서 가라또시장을 향한다. 비가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람조차 거칠다. 가까운 줄 알았던 시장은 빗길을 30여 분 걸어 오후 2시가 다 된 시간에 도착했다. 시장이 오후 3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그리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가라또 시장은 항구에 접해 있다. 가랑비가 항구를 스미듯 덮고 있다. 회색빛 하늘은 바다와 맞닿은 채 경계가 흐릿하다. 선창가에 정박한 여객선들은 안갯속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우두커니 서 있다. 기억인지, 풍경인지 모를 그 흐릿한 윤곽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누군가의 모습처럼 낯익고 쓸쓸하다.
항구의 적막과는 달리 가라또시장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바깥은 눅눅한 바다 안개와 회색빛 우울이라면, 안쪽은 왁자한 사람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교차한다. 호객하는 상인의 목소리, 여행객들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쉴 새 없이 섞여 흐른다. 새벽부터 열린 장이 막바지에 이르러 서서히 문을 닫는 가게도 있고, 막판 떨이를 외치며 할인을 한다. 이곳저곳 둘러보며 한 접시에 천 엔(약 만 원) 정도 하는 초밥과 초밥을 흥정해서 조금은 싼 가격으로 잔뜩 사들고 시장 2층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비는 여전히 바깥을 적시고 있다. 정종 한 잔씩 하며 우리들만의 만찬을 즐긴다. 남을 것 같던 초밥과 초밥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부른 배를 두드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항구는 여전히 축축이 젖어 있지만, 시장 안 사람들의 몸짓은 활기차고 생명력 있다. 이 작은 항구 도시의 안과 밖의 숨결이 피부에 스며드는 듯하다.
오늘 내가 만난 가라또 항구와 시장은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