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늘 밤 묵을 곳은 야마구치현 '미네'라는 작은 도시이다. 인구 3만 명이 채 안 되는 이 도시는 인근 아키요시다이 등 관광지 덕에 제법 규모가 큰 호텔들이 눈에 띈다. 우리가 묵을 호텔은 주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방도 1인 1실로 배정되어 있다. 단체 여행에서 1인 1실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인데, 여행사 대표님의 배려가 고맙다. 방문을 여니 가지런한 공간이 지친 여행객에게 편안하게 다가온다.
이자카야
샤워로 하루의 피로를 털고 1층 라운지에 모이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인근 이자카야 식당에 저녁이 준비되었다 한다. 하나둘 불을 밝히는 가로등이 우리의 발길을 비춘다. 제법 큰 규모의 식당엔 이미 홀뿐만 아니라, 이방 저방에서 손님들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 가득하다.
이자카야는 술과 안주를 즐기는 일본의 대중적인 선술집이다. '오마카세(お任せ)’는 주방장에게 맡기는 고급 식당인 반면, 이자카야는 '머물며 술 마시는 가게(居酒屋)'라는 뜻의 캐주얼한 술집 겸 식당을 일컫는다. 지금까지 우리 일행이 본 식당과는 달리, 완전히 여느 한국 식당을 닮은 분위기다. 닭꼬치, 회, 튀김, 찜, 나베까지 다양한 음식들이 차례로 들어온다. 맥주와 사케와 소주가 뒤섞여 오가면서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시끌벅적해진다. 술잔에 넘치는 정이 담기고, 돌아가며 권주가를 부르고, 건배 잔이 부딪히면서 모두가 술이 주는 정취에 빠져들고 있다. 사흘간 힘든 여정을 함께 한 시간이 서로를 묶는 힘이 되고 있다. 여행이 주는 또 다른 맛을 함께 즐긴다.
가라오케
얼큰하게 적신 몸들이 숙소인 호텔로 향한다. 우리 서울 일행 중 한 아우가 2차를 외친다. 우리 일행 중 맏형은 손사래를 치며 꽁무니를 뺀다. 칠순이 넘은 형은 이쯤 해서 놔주기로 했다. 대신 부산에서 온 넉살 좋은 아우가 동참해서 일행은 다시 여섯이 되었다. 2차는 인근 가라오케로 잡았다. 주택가에 자리한 가라오케에 들어서니 텅 빈 홀이 우리를 맞는다.
맥주 몇 병과 간단한 안주가 탁자에 놓였지만, 모두들 별 관심이 없다. 무대에서는 이미 귀에 익숙한 '안동역에서' 노래가 흐른다. 그곳이 고향인 아우가 부르는 노래다. 일본 가라오케는 어디 가든 한국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 때문에 일본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가라오케를 찾게 한다. 나는 90년대 후반쯤, 도쿄에 갔을 때 가라오케 밤 문화를 처음 경험했었다. 그때도 이미 가라오케에서는 우리 가요나 트로트를 맘껏 부를 수 있었다. 그때쯤 가라오케가 한국에 상륙하면서, 서울 곳곳에도 우후죽순처럼 노래방이 생겼다. 퇴근하고 동료들과 술 한잔 걸치는 날이면 노래방은 필수코스였던 시절이 있었다.
가라오케에 젊은 일본 친구가 혼자 들어선다. 뜻밖에 한국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그 친구와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어 술잔이 오갔다. 가라오케 여사장이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60대 정도로 보이는 사장님이 올해 팔순이란다. 노래실력도 그만이다. 일본 친구와 듀엣으로 부른 노래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노래와 술은 사람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는 힘이 강하다. 둘이 뭉친 공간이 번쩍이는 조명과 함께 흥이 되어 흐른다.
텅 빈 방
한바탕 노래판이 끝나고 술병이 널브러진 탁자를 남긴 채 가라오케를 빠져나왔다. 가로등도 졸고 있는 어둑한 골목길이 떠들썩 휘청이며 걷는 우리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숙소에 돌아와 뿔뿔이 흩어져 방으로 들어서니, 휑하니 쓸쓸한 정적만이 온방을 떼굴떼굴 굴러다닌다.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반신욕으로 몸을 녹인다. 호텔인데도 집으로 전화나 카톡이 여유롭지 않다. 외진 지역이라 와이파이가 로비 외의 지역에선 잘 터지지 않는단다. 답답하지만 참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 집을 생각한다. 엊그제 집 떠날 때 아내가 미소로 배웅하며 나에게 말했다.
"당신의 자유로운 영혼이 부럽소!"
이 밤, 그 한마디가 왜 이리 가슴에 메아리치는지....
시부모 모시고 3대가 40 년 가까이 살면서, 아직도 출가하지 않은 다 큰 아이들 뒷바라지로 아내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와는 달리, 나는 퇴직 이후 아내 덕에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있다.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다. 현해탄 바다 건너 먼 이국땅에서 오랜만에 아내에게 마음의 편지 한 장 보낸다.
여보!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어제 올린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이 글 이후에 올려야 할 글이었습니다. 여행일정에 따라 글의 순서가 바뀌지 않아야 하는데, 저장해 놓은 글 중 실수로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독자님들의 넓은 이해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