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한줄기 빛이 창을 두드린다. 커튼을 여니, 산 허리를 감싼 옅은 안개가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어제 종일 비를 뿌리던 하늘은 더없이 맑고 쾌청하다.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짐을 싸고,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면서 부산한 하루를 시작한다.
철로의 추억
아침 8시. 하룻밤 유멘의 기억을 남겨두고 두 바퀴에 오른다. 해변을 따라 달리는 길은 마치 우리 동해 바닷길을 달리는 것처럼 정겹다. 동해바닷길 종주 때, 바다는 하루 종일 우리를 따라오며 때론 고독하게, 때론 거칠게 울어댔었다. 지금 우리가 달리는 이 길도 그렇다. 이 도로는 매년 사이클 대회가 열릴 만큼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길이라 한다. 햇살 가득 머금고 반짝이는 파도와 더불어 달린다. 공도로 이어지는 길이지만, 어제 보다는 차량의 통행이 뜸해서 여유롭다. 어제부터 이 길은 이따금씩 철로를 만났다가 말없이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시모노세키에서 교토까지 약 670여 km를 달리는 산인 본선'이다. 바다를 따라 달리는 아름다운 해안선 구간이 많아, 특히 사진작가와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한다. 라이더들에게도 더없이 행복한 길이다.
도로와 교차하는 곳에 무인역(無人驛)이 나타난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역은 옛날 우리 시골 마을 간이역처럼, 안내판 하나와 의자 몇 개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고즈넉한 시골 풍경과 어우러진 한적한 분위기가 정겹다. 철로 건너편으로 기찻길 옆 오막살이 집들이 줄지어 있다. 수채화 한 폭 그려보고 싶은 정겨움이 철로를 따라 달린다. 문득 먼먼 기억 속에 있는 내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
나 어릴 적 살던 동네는 철길이 지났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드넓은 평야를 가로지르는 철길을 따라 1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다. 하교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철길은 동네 동무들의 놀이터였다. 좁은 철로 위에서 누가 안 떨어지고 오래 걷는지 시합을 하다가, 그것도 심드렁해지면 크레용으로 침목에 낙서도 하며 낄낄대던 아득한 시절이 있었다. 철로에 귀를 대고, 하루에 몇 번 오가는 기차가 언제 오는지 기다리는 설렘도 있었다. 운 좋게 기차가 지나가는 날이면, 철로 옆 둔덕에 납작 엎드려 덜컹덜컹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다가 멀어져 가는 기차를 아쉬움으로 뒤쫓아가곤 했다. 딱히 놀거리가 없던 시절, 동무들과 함께 뛰놀던 철로는 늘 내 가슴속에 함께하는 기억의 풍경이 되었다.
안전사고
해변을 따라가던 길이 산속으로 들어간다. 임도를 따라 달리는 길은 햇볕을 가려줘서 고맙다. 경사가 심한 오르막을 지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내달리니 다시 파도가 일렁이는 드넓은 바다가 우리를 반긴다. 바다는 여전히 햇살을 가득 품은 파도와 한가로이 놀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잠시 쉼표를 찍는다. 간식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데 웅성웅성 소란하다. 뒤늦게 도착한 여성 라이더가 무릎에 상처를 입고 앉아 있다. 임도를 내려오면서 나무뿌리 등걸에 걸려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한다. 무릎이 부어오르고, 붉은 피가 흥건하다. 여행사 대표(가이드)가 응급처치를 하고 붕대를 감는다. 마치 내 일처럼 근심스럽게 바라보는 우리와는 달리, 씩씩한 여성 라이더는 붕대를 감고 나더니 라이딩을 계속하겠다 한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마음을 건넸지만, 그녀는 넉넉한 웃음으로 우리의 걱정을 덜어낸다. 더 큰 사고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긴 하나, 오늘 하루 버텨낼 일이 사뭇 걱정이다.
얼마를 달리다가 경주에서 온 젊은 라이더의 자전거에 또 다른 사고가 났다. 체인을 받쳐주고 기어 변속을 도와주는 부품 일부가 파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또, 우리 열혈청춘 맏형의 자전거 타이어가 펑크 났다. 연이어 발생한 작은 사고가 동료 라이더들의 수심을 깊게 한다. 펑크는 준비해 간 스페어타이어로 바로 교체했지만, 기어변속 장치의 고장은 끝내 수리하지 못하고 말았다. 큰맘 먹고 멀리 이국 땅까지 온 라이더에게 자전거 고장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결국 그는 차량에 자전거와 함께 승차해야만 했다. 자전거 라이딩은 작고 큰 사고가 숨어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사고 없는 라이딩이 우선이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찌는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모두 안전한 라이딩을 기원하며 서서히 페달을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