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모노세키로 간다
이제 막 승선을 마친 사람들로 배 안은 우당탕 어수선하게 돌아간다. 객실에 짐을 풀고 나니, 곧 식당에서 배식이 시작된다는 안내방송이 익숙하지 않은 일본어와 함께 울려 퍼진다.
오랜만에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았다. 조촐하지만, 포장되어 나오는 기내식보다는 푸짐하고 편하다. 가져간 소주를 종이컵에 한 잔씩 가득 담아 들이켜니 온몸이 짜릿하다. 캬~~ 바로 이 맛이다. 하루의 피로가 스멀스멀 녹아내린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동료들과 목욕탕에 갔다. 작고 소박하지만, 배에 공동 목욕시설이 있다는 게 재밌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세상 부러울 것 없다. 하루의 피로를 털어내는 목욕은 종일토록 부려먹은 내 몸에 주는 작은 사랑이다. 사랑을 받은 몸이 가뿐하다.
가벼워진 몸으로 열혈청춘들과 함께 다시 갑판에 올랐다. 이미 어둠이 삼킨 부산항 앞산 등성이에는 인간들의 불빛이 빼곡히 뿌려지고, 까만 바다는 도시의 불빛을 영롱하게 담아내고 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오색 불빛을 두르고 실루엣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밤 9시가 되니 출항을 알리는 고동소리와 함께 서서히 부관페리호가 미끄러지 듯 움직인다. 한낮의 번잡했던 인간 세상을 덮어버린 어둠 속에서 불빛만 깜빡거린다. 하얀 포말을 쏟아내는 선미에 서서 멀어져 가는 부산항을 바라본다. 육지의 소음은 점점 희미해지고, 파도가 선체를 스치는 소리 만이 귓전을 때린다.
이제 불빛마저 아스라이 멀다. 바다는 한없이 검고 선선한 바람을 뿌린다. 하늘은 별빛 몇 개를 품은 채 고요하다. 배는 작은 출렁임을 안고 밤바다를 달리고 있다. 북적이던 갑판 위엔 하나 둘 사람들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오롯이 나 혼자 서 있다. 낯선 땅을 향하는 배 위에서 비로소 떠난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 만의 적막을 즐긴다.
객실로 돌아왔다. 우리 열혈청춘들만의 시간이 왔다. 선실에 조금은 불편한 자리를 깔고, 소주파티를 열었다. 떠나기 전 넉넉하게 준비한 소주가 놓이고, 저녁식사 때 식당에서 종이컵에 담아 온 안주거리를 펼치니 나름 진수성찬이다. 처음 맛보는 밤바다 해외여행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모두들 평소보다 잔의 움직임이 빠르다. 오늘의 행복을 나누고, 내일의 기대를 담은 왁자한 웃음소리, "열혈청춘만세 파이팅!" 구호와 함께 첫날밤이 익어간다.
얼큰하게 적신 몸을 침대에 뉘인다. 우리가 하룻밤 묵을 선실은 2층 침대로 되어있다. 넷이서 한방에 배정되었다. 다소 좁지만, 누워 자고 갈 수 있다는 것만도 행복이다. 비행기는 밤새 날아도 꼬박 좁은 의자에 앉아서 버텨야 하는데, 누워 보니 이 만한 행복이 없다.
배는 현해탄을 건너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까지 열한 시간을 달린다 했다. 지금 이 배는 태평양 어드메쯤을 누비며 거친 파도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배가 울렁울렁 흔들린다. 기분 좋은 흔들림을 즐긴다. 어느새 아우들의 코 고는 소리 들린다.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지만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밤이 깊어지면서 사위는 더욱 적막하다. 오로지 객실의 작은 유리창으로 까만 바다의 출렁임만이 스며들 뿐이다.
한숨 자고 나면, 이제 새로운 땅, 새로운 언어, 새로운 아침이 올 것이다. 단순히 국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낯섦 사이의 경계를 건너게 해 줄 것이다.
적요한 밤바다를 달리는 배가 조용하고 느리게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