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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Apr 30. 2024

단과 조시(Don & Josie) 선생님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두 배나 되는 세월이 훌쩍 가버렸다. 덴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그분들과 통화를 했고, 여행 도중  두어 번 더 전화를 걸었다. 만나는 장소와 시간을 상의했다. 우리는 덴버 시내 근사한 음식점에서 그분들을 모시고 싶었다. 그러나 번거롭게 밖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당신들 집으로 오라며, 한사코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오늘,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변해있을 그분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  우리 가족 모두는 설레는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그분들이 살고 있는 곳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 혹시 우리가 너무 커버려서 몰라 보지는 않을까? 

"두 분은 얼마나 변하셨을까?", 단(Don) 선생님은 나이가 있으시, 혹시 건강이 안 좋으신 건 아닐까?"....


아이들과 아내는 각자 갖은 상상과 기대를 쏟아내며 차 안은 온통 흥분으로 가득했다.

가는 길에 월마트에 들러 과일 한 바구니를 사들고, 만나기로 약속한 오후 4시에 맞춰 차를 몰았다. 번거로운 도로를 벗어나 주택가로 들어서니,  낯설지 않은 거리가 한가롭게 다가온다.

집 앞에는 노부부가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그들은 두 팔을 벌리고 우리 부부와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달려왔다.

서로 부둥켜안고 얼굴을 바라보며, 꿈인지 생신지 믿기지 않는 현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모두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가득했지만, 눈가는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이제는 노년의 나이가 된 선생님 부부는 우리가 우려했던 것만큼 많이 늙어 보이지 않고 건강하셔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올해로 여든두 살인 단(Don)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고, 일흔두 살인 그의 아내 조시(Josie)는 중학교 선생님이었다. 두 분은 나이 차이가 꽤 있지만, 전혀 그 간극을 느끼지 못할 만큼 서로에게 늘 다정한 잉꼬부부였다.

20년 만의 눈물의 만남


우리가 그분들을 만난 것은 유학 초기 시절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지도해 줄 수 있는 튜터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비영어권 학생들에게는 원할 경우, 지역사회의 은퇴한 선생님을 튜터로 추천해 주기도 했다. 당시 막 학교에서 은퇴를 한 Don 선생님을 딸아이 학교로부터 추천받은 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후 약 2년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아이들과 만났다. 한 번은 그분들이 우리 집에 왔고, 한 번은 우리가 그분들 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원래는 Don 선생님만이 우리 아이들의 튜터였으나, 부인인 Josie도 기꺼이 아이들의 튜터가 되어주셨다.


당시, 그분들의 2남 1녀 자식들은 모두 출가한 후라서, 두 부부 만이 덩그러니 큰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시기에 우리 아이들을 만나면서, 마치 당신들의 손자 손녀인 양 예뻐해 주셨다.

그분들은 한국의 주입식 교육처럼 교재를 가지고 진도를 나가는 수업이 아니라, 그냥 만나서 놀이를 하고, 게임도 하고, 때론 요리도 함께 하면서 아이들이 영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었다. 직업이 선생님인 두 분은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숙제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영어 회화 실력이 날로 날로 몰라보게 늘었다.


우리의 인연은 방학 때도 계속되었다. Don의 고향은 미네소타주의 작은 도시인 베미지(Bemigji)라는 곳이다. 5 대호의 하나인 슈피리어호 인근에 있는 마을인데, 전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여름방학 때면 두 분은 고향에 있는 작은 별장에 가 있다가, 방학이 끝날 때쯤 다시 덴버로 돌아왔다. 우리 가족도 여름방학이면 동부와 서부를 한 달씩 차량으로 여행을 했는데, 그 여행의 마지막은 두 번 모두 미네소타 베미지를 경유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의 집은 디어 레이크(Deer Lake)라는 호숫가에 자리한 자그맣고 예쁜 집이었다. 앞마당 나무에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새장에 새들이 모여들었다. 아침이면 새소리에 잠이 깨어, 커튼을 살짝 열고 모이를 쪼아 먹는 새들을 바라보곤 했다. 밤에는 사슴과 너구리, 오소리 같은 작은 짐승들이 돌아다닐 만큼 한적한 곳이어서 다소 무섭기까지 했지만, 사람이 다칠 정도로 위험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물고기가 잘 잡히는 아침과 저녁나절에는 배를 몰고 호수로 나가 함께 낚시를 했다. 저녁나절 호수 저편으로 해가 질 때면, 우리 모두는 노을빛에 붉게 물들곤 했다.

DON 선생님은 낚시 솜씨가 노련했다. 우리들 낚싯대에는 입질조차 하지 않는데, 그는 연신 이런저런 물고기를 많이 잡아 올렸다. 태어나서 낚시를 처음 해 보는 아이들에게 그는 미끼 꿰는 법부터 릴낚시 던지는 요령까지 잘 가르쳐 주었다. 아들이 우연히 노던(Northern)이라는 팔뚝만 한 고기를 잡아 올린 날도 있었는데, 재미를 붙인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호수를 놀이터 삼아 둥둥 떠다녔다.  

그날 잡은 고기를 Don 선생님이 손질을 하면, Josie 선생님이 튀김요리를 해서 풍성한 저녁상을 만들었다.


20년 전 베미지 Deer Lake


그렇게 우리는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마치 가족처럼 2년 가까이 함께 했다.

미네소타 농촌 출신인 Don은 도시적이지 않은 품성으로, 선생님답게 무엇이든 친절히 가르쳐주는 것을 좋아했다. Josie는 스페인 출신인 아버지가 미국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필리핀 출신으로, 이민 2세인 조시는 아시아 사람의 따스한 가슴을 가졌다. 그런 분들을 우리가 만난 것은 정말 대단한 행운이었다.


20년 전, 우리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도 미네소타주 베미지였다. 2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 그들이 휴양차 가 있던 미지에 들러서 마지막 나흘을 함께 했다. 헤어지던 날,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언젠가 꼭 만나자고,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약속하며 헤어졌다.

우리가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분들의 편지가 먼저 와 있을 정도로 그분들의 마음은 따뜻했다. 나는 아이들이 영어로 쓴 일기와 추억이 함께한 사진들을 모아 책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냈다.


2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그분들과 연락이 된 것은 딸내미 역할이 컸다. 그동안 딸아이가 종종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인연의 끈을 이어 왔다.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우리 아이들이 장성하여 어엿한 사회인이 된 오늘, 20년 만에 그들을 다시 만난 것이다. 우리가 덴버 추억 여행을 꼭 하고 싶은 이유 중에는 그분들이 늘 함께 했었다. 그 마음의 끈이 서로 통하여 오늘이 있게 했다.



눈물의 상봉을 진정시키며 집안으로 들어가니, 20년 전 그 분위기가 그대로 풍겼다.

반지하에 아늑한 가족 모임 거실과 화장실이 있고, 1층엔 넓은 거실과 탁자와 주방, 그리고 침실이 있는 2층으로 가는 계단이 고스란히 옛 기억을 소환해 주었다. 두 분은 우리와 만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었다. 단 선생님이 퇴직을 하면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 주택가 아늑한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었다. 그 뒤로 이사 한번 가지 않고 그들은 이 집에서 20년을 살고 있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준비해 간 선물 꾸러미를 풀었다.

하나는 20년 전 크리스마스 날, 그분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던 순간을 담은 사진 액자이다. 20년 전 젊은 모습을 본 두분은 깜짝 놀라며, 미국인 특유의 제스처와 함께 행복해 했다. 또 인사동에서 구입한 한국 고유의 접이식 부채와 내가 캘리그래피로 직접 쓴 '만남'이란 액자도 선물로 드렸다. 액자에는,

사람과 사람의 작은 만남이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A small meeting of people is the beginning of all changes. )라는 글귀를 넣어, 그분들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선물을 받은 두 분은 전혀 기대 못한 귀한 선물이라며, 오래 오래 간직하겠다고 했다.


우리가 드린 선물


선물을 받은 단 선생님이 깜짝 놀랄만한 것을 보여 주겠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오더니,  "Surprise!"를 외치며 책 한 권을 내민다. 우리가 20년 전에 보내 드렸던 바로 그 책이었다. 그들은 여태까지 잊지 않고 책을 간직해 오면서 가끔씩 꺼내보곤 하였다 한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분들이 준비한 저녁 만찬은 또 한 번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닭고기 요리, 콩스튜, 달걀 프라이, 식빵과 버터. 라이스 등 전통적인 미국식 식탁이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을 두어 번 가져다 먹었는데도, 조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계속 더 먹지 않겠냐고 묻고 또 묻는다. 마치 우리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 했던 그 마음처럼.....

저녁 만찬이 끝나고도 차를 마시며 그동안 쌓였던 얘기들은 계속 이어졌다.

그 옛날 아이들과 함께 했던 즐겁던 기억들, 아이들의 직업에 관한 이야기, 또 우리 부부가 살아온 얘기와 당신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이가 여든이 넘은 단 선생님에게 혹시 아픈 적은 없었냐고 물으니,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한다. 그동안 노인들에게 많은 전립선암을 앓았고, 코에 피부암이 발병하여 두 번씩이나 암투병을 했단다. 그 힘든 과정을 아내인 조시가 있어 잘 극복하고 오늘의 내가 있게 했다며,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다행히 모두 초기에 발견해서 잘 극복을 할 수 있었다 했다. 그 어려운 과정을 견디고, 이렇듯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건강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강조하는 단과 조시 선생님의 말에 나와 아내는 깊은 공감을 했다.


단 선생님은 얼마 전 증손녀가 태어났다며, 행복한 미소와 함께 사진을 보여준다. 미국아이들 특유의 인형같이 이쁘고 귀여운 아이의 모습이다.

그들의 큰 아들은 고향 땽 미네소타에 살고 있고, 둘째 아들과 딸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콜로라도에서 살고 있다 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큰 집을 관리하기도 힘들고, 특히 딸이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자고 해서 이사를 고민 중이라고도 했다. 나와 아내는 꼭 그리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나이 먹으면 딸이 최고인가 보다.


이렇게 오랜 시간 외국인과 대화한 지가 얼마만인가! 영어를 쓰지 않은지 오래여서, 가슴 절절한 마음을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아내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은 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때마다 아들과 딸이 원활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우리 아이들이 이만큼 영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 고마움을 진심을 담아 여러 번 얘기했다.

거실 풍경


시간이 흘러 밤 9시가 넘었다. 만난 지 어언 5시간이 되었는데도 헤어지기 싫었다. 그분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밤 8시쯤이면 잠자리에 든다는 그들이 9시가 넘었는데도, 대화가 끝날 줄을 몰랐다.

나는 언젠가 머지않은 날, 그들이 서울에 꼭 한 번 올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얘기했다. 그분들도 그러기를 바라지만,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솔직히 말한다. 특히 단 선생님은 장시간 비행기 타는 것이 힘들어서 먼 여행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이번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일 것이다. 또다시 만난다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는 언젠가 꼭 다시 만나는 희망을 갖자고 여러 번 다짐했다.


또다시 긴 이별 속으로....

 일어서는 아내에게 조시 선생님이 종이 박스를 하나 건넨다. 땅콩버터와 딸기잼을 바른 샌드위치, 쿠키와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내일 공항 갈 때 요기를 하라고 준비했다 한다. 떠나는 순간까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집을 나서기 전,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분들은 함께 기도를 하자고 했다. 둥글게 서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단 선생님의 기도는, 헤어져 있어도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며, 서로 연락하고 살기를 희망하는 기도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는 잡은 손을 높이 들고 "Amen!"을 외쳤다.

그렇게 간절하게 만나기를 원했던 20년 만의 해우가 마지막 기도와 포옹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밖은 가로등 하나 외롭게 깜빡일 뿐, 하늘도 땅도 깜깜했다. 우리 가족 모두 차에 올라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올 때까지 그들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젠가 또다시 볼 날이 올까?" 나의 독백과 같은 말에 아무도 대답이 없다.


 돌아오는 차 안에는 만나러 갈 때의 흥분은 사라지고, 무겁고 긴 침묵만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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