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말일 자로 근무하던 학교를 퇴직하고 큰딸의 7살, 4살 두 아들 어린이집 등원을
돕는 게 나의 첫 일이 되었다. 정년이 몇 년 남았지만, 퇴직을 결심하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복직해서 허위허위 두 아이를 둘러메고 전쟁 같은 아침을 시작할 큰딸 모습을 상상만 해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젊은이들이 끝까지 워킹 맘을 유지하려면 누군가 도와주는 손길이 절실하다는 것을 직장에서 많이 보았다. 힘닿는 데까지 특히 정서적으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항상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퇴직 결심을 내리기 전에 두 딸과 충분히 상의했다. 딸들은 어머니가 늦은 나이에
마음에 드는 직장에 들어가서 자부심과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생활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며.
자기들 욕심대로 그만두고 아이들을 돌봐주라는 말을 못 했다고 한다.
손주를 돌봐야 하는 사정으로,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는 직장을 그만두지는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엄마가 힘들어 그만두는 것은 괜찮지만 ~~~ ”
하며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결단을 못 내리고 우왕좌왕하는 친정어머니를 보고 얼마나 속이 탔을까?’
두 딸은 세 아이를 어떻게 돌볼 것인지 예측 가능한 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워킹 맘들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아는 엄마로 손자 돌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예쁜 손주들을 돌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최종 결단을 내렸다.
엄마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확인한 큰딸은 아들 둘을 어린이집에 등원시켜 주면 좋겠다고 정중히 부탁했다.
함께 근무한 동료들은 7살, 4살 손자를 보게 된 나를 축하해 줬다.
육아 선배로서 묘수를 전수해 달라고 야단들이었다. 나도 처음 큰딸의 제안
“엄마, 아침 2시간만 봐주시면 돼요, 아침밥 먹이고 놀다가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면,
하원은 제가 시키면 돼요.”
라고 해서 아주 간단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발끝까지 내려오는 엄마 옷을 걸치고 나풀거리며
“할머니, 이게 엄마 냄새예요. 엄마 냄새나는 이 옷 입고 등원할래요?”
킁킁거리며 엄마 냄새를 맡고 있는 손자를 보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런 아이들 몸과 마음을 다잡아 아침밥 먹이고 등원시키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식, 연인 사이에도 밀당이 필요하다.
할머니와 손자들 사이에도 밀당은 아주 중요한 전략이었다. 3월 한 달 동안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밀당을 하며 두 손자는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손자들에게 적응해 갔다.
그동안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외갓집에서 편하게 저녁 먹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어울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엄마와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로 어린이집을 다녔다. 그러던 손주들은 엄마가 아닌
할머니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니 긴장도 되고 불안한 듯 보였다.
자주 부딪히며 싸우고 울 때는 얼마나 난감하던지!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할머니 모두가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상담 선생님과 상담할 때 울컥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선생님은 내 손을 감싸 안으며
“다 잘될 거예요. 손주들은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으로 잘 커갈 거예요.”
두어 달이 지나 어느 정도 손자들과 신뢰와 친근감으로 편안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둘째 손자는 엄마가 있을 때는 나를 할머니라고 부르고, 출근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엄마 할머니라고 불렀다. 둘째는 아침마다 얼굴 가득 웃음 담고, 실눈을 뜨며 할머니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꽉 안아주라며 보드라운 엉덩이를 들이미는 모습에 할머니는 홀딱 빠지고 말았다.
‘세상에 누가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러나 날마다 예기치 않은 변화무쌍한 일들이 벌어져 새로운 학급을 대하는 듯한 느낌은 여전했다.
조카 바보인 작은 딸은 지난해 딸을 출산하고 육아 휴직 중이다.
결혼 전부터 언니 집에 오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조카들 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취미활동이고,
그들이 최고의 친구란다. 손주들도 너희가 감기 들면 이모가 만나러 올 수 없다는 말을 가장 무서워했다.
가끔 조카들이 어린이집 등원 전에도 보고 싶다고 돌도 안 된 손녀를 둘러메고 달려오곤 했다.
2살 손녀는 멍하니 비몽사몽 하다가 오빠들 환호성에 깜짝깜짝 놀라며 울었지만, 서서히 적응해 갔다.
가끔 오빠들에게 살포시 기대기도 하고 장난감에 관심을 보이며 셋이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황홀한 광경으로 불도장처럼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을 것이다.
작은 딸은 이렇게 소중한 장면 하나하나를 놓치기 아쉽다며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추억을 담았다.
친정엄마로서 두 딸이 출산 후에 ‘혹여나 산후우울증에라도 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세심하게 지켜봤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라도 친정 엄마와 조카들 보러 오는 것이 작은 딸
나름의 우울감을 떨쳐버리는 해결책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이모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는 것인지.
큰손자는 취향저격의 말로 자주 이모를 심쿵하게 한다.
이모하고 체스 게임을 하면서
“이모, 내가 돌봐줘야 할 대상이 1번, 2번, 3번이 있어요.”
“그게 누구야?”
“1번은 엄마 배 속에 있는 동생, 2번은 사촌 여동생 유정이,
3번은 내 동생 김 성규야.
1번은 잘 보살펴줘야 하고, 2번은 잘 놀아줘야 하며, 3번과는 잘 싸워야 해.”
이모와 체스 게임을 재미있게 하는 형을 본 4살 손자는 심통이 났는지 체스판을 막 뒤엎으려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큰손자는 한 손으로 동생을 야무지게 제압하며 씨익 웃으며.
“이모, 봤지? 이렇게 3번과는 자~~알 싸워야 해.”
어쩜 이렇게 식구들과의 관계를 잘 파악하는지! 딸과 나는 혀를 내둘렀다.
육십 평생을 살아보니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였다.
겨우 7살짜리 손자가 상황 파악을 이렇게 잘하다니!
우리 큰손자 정말 놀랍도록 듬직하고 멋지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째 딸은 자기 딸이 순번 2번이라는 것에 감동하고 조카들을 격하게
끌어안으며 뽀뽀 세례를 했다.
“성호야, 우리 유정이 어때?”
“그저 그래”
라며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형님 바라기 둘째도
“그저 그래”
라고 따라 하기만 했다.
그런 아가들이 자기 딸을 “유정이는 귀욤 관찰 쟁이”로 등극시켜 줬다고
어찌나 좋아하던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더 크고 멋진 생각들이 숨어 있을까?’
요즘 나는 어른들보다는 아이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지고,
감성의 폭이 더 넓어진 것 같다. 몸으로 부대끼며 손주 돌보면서 받는 이 느낌은 피곤함을 쏴악
날려버리는 청량제가 된다.
나는 손주들이 평범하게 내뱉는 이 소중한 말들을 그 순간 그 장소에 있었기에 담을 수 있었다.
나는 참 운도 좋은 할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