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우도 홀릴듯한 초목의 향, '폭스진'을 음주해보았다.
다양한 술의 종류들 중 하나로 진이라는 것이 있다. 이 주종은 술을 만듦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주니퍼베리, 우리말로는 노간주나무 열매를 사용하는 증류주이며, 보통은 칵테일을 만드는데 많이 이용된다. 우리가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봄베이 사파이어', '고든스 진', '비피터 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사실 진의 경우 외국산은 그 숫자가 꽤 있는 편이지만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전통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국내산 진이 있는 것 자체를 모를 정도이다. 대형마트에 간다고 해도 어지간한 크기가 아니면 보이는 것은 모두 외국에서 들여오는 것들 뿐이지, 한국에서 탄생한 것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마주치기 힘들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라나에서 태어난 진을 하나 가지고 왔다. '폭스진', 이름부터 매력적인 친구인데, 그 생긴 것이 이름에 지지 않을 정도로 시선을 끈다. 과연 경상북도에서 태어난 진은 어떠한 맛과 향을 보여줄지, 뚜껑을 열어보도록 하자.
여우도 홀릴듯한 초목의 향, 폭스진
상당히 매력적으로 생긴 병의 모습이다. 형태부터 일반적인 술병의 모습과는 달리 길고 얇은 수통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 끝은 은색 뚜껑으로 막아져 있다. 이 술에선 전면부에 보이는 여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얼핏 보면 사나워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강아지 같기도 한 것이 술의 이름과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여우의 뒤에 보이는 식물은 '폭스진'을 만드는 데 사용된 홉과 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병의 모습도 마음에 드는 술이지만, 그것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술을 포장하고 있던 패키지이다. 이 패키지 같은 경우는 흰색의 박스로 봉투처럼 열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단추에 걸린 붉은 끈을 돌리면 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일반적인 전통주는 패키지의 역할이라고 해봤자 술을 보관하는 것이 끝이지만, 폭스진은 이런 면모를 통해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듯하다.
패키지부터 병의 모양, 디자인까지 마음을 끌어 그런지, 개인적으론 술을 마시기 전부터 평소보다 여러모로 기대가 되는 느낌이다.
'폭스진'은 '문경주조'에서 직접 재배하고 수확한 홉으로 만든 술로서, 발효와 숙성 모두 황토실에서 이루어진다.
경북 상주의 '상주 옹기장' 무형문화재 정대희 장인의 옹기에서 숙성해 맛은 한 층 더 부드러워지고 향은 한 단계 더 깊어졌으며, 시트러스한 홉의 향이 한 차례 퍼지고 난 후에는 은은한 단 맛이 아늑하게 퍼진다고 한다.
제품의 용량은 350ML, 도수는 25도, 가격은 16,900원. 혼술 하기 딱 좋은 용량에 다른 진에 비해선 상당히 낮은 도수, 거기에 치킨 한 마리 값 정도를 지니고 있다. 이 술의 신기한 점은 주니퍼베리가 아닌 홉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면이 어떠한 차이점을 가져다 줄지 궁금하다.
잔에 따른 술은 레몬즙 몇 방울을 떨어뜨린듯한 빛깔을 선보인다. 투명한 물 위로 굉장히 옅은 달빛이 비치는 듯한 모습으로서, 고요하니 깨끗하게 느껴진다.
몇 번 흔든 뒤 코를 가져다 대니 싱그러운 초목의 향이 잔을 타고 올라온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향, 보통 주니퍼베리가 들어간 향을 맡을 때는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독특하다'라는 생각이 떠오르는데, '폭스진'은 그 낯섦의 정도가 약간 다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허용할 수 있는 독특함이라고 해야 하나.
시트러스, 국화, 풀, 씁쓸함 등에 조금의 상큼함이 더해져 다가오고, 향은 은은하지만 잔을 가만히 놔둬도 서서히 공기를 채울 정도로 그윽하다. 정말 사람을 홀릴듯한 향이다.
이어서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으면 산뜻한 고미가 혀를 감싸준다. 상당히 복합적으로 느꼈던 향과 달리 맛에 있어선 비교적 단순하고 깔끔한 맛이 자리 잡고 있으며, 질감이 부드러워 혀에서부터 목넘김까지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25도라고 하지만 알콜의 존재감은 향이나 맛에서 거의 비치지 않는다. 독함이나 역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은 채 잘 정제된 풀과 나무를 마시는 듯한 맛매를 가져다주고, 술이 입을 채우는 동안 특유의 향이 코에 번져가기에 그 조화가 참으로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든다.
부드럽게 목구멍을 넘어간 이후에는 미미한 씁쓸함과 약간의 향을 코에 남겨 놓고 사라진다. 맛보다는 향이 조금 더 오래 남는 술로서, 그 길이가 길진 않으나 여운을 즐기기엔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술 자체가 전반적으로 산뜻하다.
적당한 바디감에 이 향과 함께 퍼지는 풍미가 참으로 만족스럽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향은 복합적이고, 맛은 비교적 단순하기에 그 어울림이 상당히 좋다. 둘 다 복합적이거나, 둘 다 단순했다면 어려움, 혹은 아쉬움이 따랐겠지만 맛에서 한 차례, 향에서 한 차례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서 술이 가진 가치가 배가 되는 듯하다.
사실 진은 다양한 칵테일로 소비되듯이 단품으로 마셔도 좋고, 무언가와 섞어 마셔도 좋은 주종이다. 그렇기에 평소 같은 경우라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셨을 듯한데, '폭스진'은 다른 진에 비하여 본연의 맛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향이 좋은 것도 있고, 그 어우러짐이 좋은 것도 있고, 도수도 높지 않아 한 작품으로 즐기기에도 크게 무리가 없다. 초목이 가져다주는 향미는 몇 잔을 반복해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만약 음주할 계획이 있다면 안주는 한식을 추천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양념이 많은 것보다는 살짝 간이 되어있는 전류, 특히나 버섯 전이 참 괜찮을 것 같다.
'폭스진', 이름만큼이나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는 술이었다. 다른 것도 좋지만 초수를 담은 듯한 향이 특히나 매혹적이다.
판매처에 따라 10%정도 가격이 상이하다.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잘 보고 판단하여 구매하길 바란다.
초목의 향이 매력적인 '폭스진'의 주간 평가는 4.0/5.0이다. 여우가 괜히 여우가 아니더라.
주간일기의 모든 내용은 개인적인 평가임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