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의 기틀을 마련하다, '태사주'를 음주해보았다.
100잔의 술을 마시는 것은 100개의 역사를 배우는 것과 같다, 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술이든 그 술이 태어나기까지 저마다의 삶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위스키든, 와인이든, 전통주든 무릇 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친구들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오늘은 그런 역사들 중에서도 대한민국의 고려와 관련이 있는 술을 한 병 들고 왔다. '태사주', 도대체 얼마나 크게 영향을 끼쳤기에 무려 '고려개국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잔뜩 간직한 기대와 함께 뚜껑을 열어보도록 하자.
고려의 기틀을 마련하다, 태사주
겉으로 보이는 술의 외관부터 심상치가 않다. 묵색으로 뒤덮인 병은 뚜껑까지 검게 물들어 있으며, 전면부에는 '태사주'라는 술의 이름이 유려하고 힘있는 글자체로 적혀 있다. 보통 라벨을 이용하는 다른 술들과는 달리 소주의 명칭 자체가 병에 박혀있는 형태이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지 이름 이외에 부가적인 설명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흑색의 바탕에 수 놓인 금빛 물결은 사람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듯하다.
'태사주'는 '안동소주올소'에서 찹쌀과 고구마, 보리를 넣어 탄생시킨 술이다. 원래는 5가지 삼 중 하나인 '고삼'을 이용하여 만들어지나 과용 시 경련을 일으킬 수 있기에 앞서 말한 곡식을 대신 사용하여 '고삼주'의 맛을 그대로 재현해 냈다. 이렇게 태어난 소주는 맑고 은은한 색을 띠며 달콤하고 쌉싸름한 뒷맛을 느끼게 하여 안동의 강건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 '태사주'는 '고려개국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 술에 아주 흥미로운 역사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상당히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해 후백제 견훤에게 쫓기면서부터 시작된다.
공산전투로부터 도망간 왕건은 안동의 옛 지명인 고창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그는 고창 호족(김선평, 권행, 장길)의 도움으로 견훤과 다시 한번 맞설 준비를 시작하며, 그 준비 중 하나로 주모 안중에게 고삼으로 만든 술을 견훤군에게 대접하라고 이야기한다.
시간이 지나 견훤군 역시 고창에 이르고, 그들은 왕건의 계획대로 주모 안중의 객주 마당에 머무르게 된다. 이 때 마당의 장독에는 미리 준비해 놓은 달달한 '고삼주'가 가득 차 있어 그들의 코를 연이어 자극하기 시작하니, 어찌 그들이 유혹을 참을 수 있겠는가. 결국 선을 넘은 병사들은 고삼주를 들이키며 인사불성이 되고야 말았으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왕건이 견훤군을 기습하여 전쟁을 승리로 끝낸다.
승리 후 태조 왕건은 세 명의 재지 호족에게 안동 김 씨, 안동 권 씨, 안동 장 씨의 시조와 함께 임금의 스승이라는 '삼태사' 칭호를 내리고, '동쪽을 편안하게 하였다'라는 의미를 담아 안동(安東)으로 지명을 변경하였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반도 재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정말 괜히 '고려개국주'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다.
작품의 용량은 360ML, 도수는 35도, 가격은 23,000원. 혼자 마시기 적당한 양에 일반적인 소주의 두 배 정도 되는 도수,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금액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가격이 부담스러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잔에 따른 술은 여타 증류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깨끗하고 투명하며, 고요히 잠들어 있는 저수지를 연상시킨다.
코를 가져다 대니 구수한 내음과 함께 알코올이 밀려들어온다. 뭉툭하게 흘러나오다 날카로움을 보여주는 친구로서, 생고구마와 구운 보리가 약간씩 느껴진다. 35도라고 하여 알콜의 역함이 따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고, 구수한 곡식이 코를 마주한 뒤 순수한 알코올향이 치고 나온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미미하게 맵싸함, 후추, 훈연의 지니고 있으며, 배향이 끝부분에서 꼬리를 슬며시 흔든다.
이어서 한 모금 머금으면 달짝지근하니 씁쓸한 술이 혀를 안아준다. 맛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일반적인 증류주처럼 알코올의 맛을 중심으로 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닌 생고구마가 줄법한 맛매에 감미를 더하여 입 안을 채워간다. 이후 조금의 고미와 고소함이 나타나 목구멍을 건드리고, 알콜과 함께 목구멍부터 속 안까지 몸을 뜨뜻하게 뎁힌다.
35도라는 도수에 비해서 비교적 약한 체감도수를 느낄 수 있으며, 향과 함께 들어오는 술의 풍미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술 한 잔을 통해 입과 코가 동시에 즐거워질 수 있는 소주라고 여겨지고, 질감 자체가 부드러운 편이라 목넘김 역시 전혀 거리낌이 없다.
목구멍을 넘어간 후에는 옅은 향과 씁쓸함이 남아 여운을 가져다준다. 후미는 3~5초 정도로서, 여운이 길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산뜻하게 사라져 다음 잔을 편하게 마시기에 용이하다. 전반적으로 씁쓸한 감미가 맛을 이끌어 가며, 빠르게 마신다면 깔끔함을, 천천히 음미한다면 코에서부터 번져가는 술의 색을 느낄 수 있다.
전체적인 조화 또한 꽤 괜찮다. 구수한 향에 더해지는 약간의 감미와 고미, 생고구마를 떠오르게 만드는 맛매와 잘 다듬어진 알코올까지. 각각의 맛이나 향들이 크게 튀는 것 없이 자신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한다. 이 어우러짐에 한 잔 두 잔 들이켜다 보면 어느새 알딸딸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그 느낌이 궁금한 사람은 한 번쯤 음주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만약 음주할 계획이 있다면 안주는 한식, 그중에서도 떡갈비, 돼지갈비 등을 권하고 싶다. 떡갈비 한 점에 태사주 한 잔이라면 누구도 모르게 견훤의 군사가 되어 있지 않을까.
'태사주', 자신만의 매력을 간직한 술이었다.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감미는 당시 병사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판매처에 따라 가격이 상이하다. 10% 이상 차이가 나는 곳도 있으니 잘 살펴보고 가장 저렴한 사이트에서 구매하길 바란다.
왕건의 승리를 가져다준 '태사주'의 주간평가는 4.0/5.0이다. 원래의 '고삼'을 넣은 맛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주간일기의 모든 내용은 개인적인 평가임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