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가끔,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곳으로 이끌고 갑니다.
멋진 걸(girl) – 이제 우리는 산호 공주(Coral Princess)에게 갑니다
우리가 승선하게 되는 배의 이름은 산호 공주입니다.
소설 <빨강 머리 앤>에서, 앤은 이렇게 말했지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라고.
과거에는 크루즈 여행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또 내가 이렇게 크루즈 여행을 즐길 것이라고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답니다. 청소년 시절, 흑백 화면으로 본 <사랑의 유람선>이라는 미국 드라마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먼 나라의 것으로 알았고, 잡지나 뉴스 등을 통해 크루즈 생활의 사진을 보게 되면 그저 ‘좋겠다!’ 하면서 부러워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요.
보슬보슬 내리는 비 사이로 4개의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호텔을 나와서 시드니 크루즈 터미널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답니다. 정말이지 무거운 캐리어의 하중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가장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사진은 멋진 여행지의 풍광이나 여행지 일정이 아니라 비행기 탑승 직전의 사진이라는데, 저도 마찬가지였지요. 아름다운 시드니 항구에 위풍당당하게 정박한 커다란 크루즈 선박의 모습을 보니 긴 크루즈 여행의 기대감과 긴장감이 교차하며 이 여행이 정말로 시작되는 것임을 실감하게 되었답니다.
우리가 승선한 Coral Princess는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사양으로 설계되었으며, 승객 2,000여 명, 승무원 1,000여 명이 승선하는 중형 사이즈의 선박이지요. 우리는 이 산호 공주와 함께 110일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코비드 비대면의 시간들을 거치면서 안전 교육도 바뀌었습니다. 방 안에 있는 TV의 화면이나 휴대폰의 앱으로 해상 안전 교육을 먼저 시청하고 바로 우리 방이 소속되어 있는 muster station으로 가서 등록하면 승선 후의 첫 번째 과제가 완료되는 것이었지요.
오후 6시 15분, 부~웅 중저음의 뱃고동이 울리면서 서서히 크루즈 선박이 좁은 부두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짙푸른 물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흰 거품을 동반하면서 천천히 나가기 시작하는 첫 뱃고동 소리를 들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더군요. 뱃고동이 울리자마자, 짙은 바다의 향기와 함께 다가오는 여행의 시작을 실감했습니다.
크루즈가 출항하는 순간, 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스치고, 물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가벼운 흥분이 더해졌습니다. 주변 승객들의 즐거운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여 마치 작은 축제처럼 느껴졌습니다. 모두가 기대감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이 제 가슴을 더욱 뛰게 만들었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감각이 살아나는 듯한 기분이었고, 이 새로운 여정이 어떤 놀라운 일들을 가져다줄지 궁금해졌습니다.
머리를 한번 휘둘러 감싸고 뒷머리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스카프 위에 캡 모자를 쓴 여성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뷰티플’을 연신 내뱉으며 멀어지는 시드니 항구를 사진 속에 열심히 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 누군가가 마치 배웅을 나온 것처럼 우리는 손을 흔들었습니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내 손에 담아 흔들었지요.
초겨울로 접어드는 시드니의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스치며, 짭짤한 바다 내음이 섞여 나의 설렘을 가중시키고 기대감을 한층 높여 주었습니다. 아무 대답도, 반응도 없는 오페라 하우스는 점점 작아지고 멀어지고 있지만 우리의 새 여정을 응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느꼈답니다.
로렌스 알마 테디아의 <클레오파트라> 그림처럼 팔뚝에 뱀 문신을 팔찌처럼 한 여인이 검은색 바탕에 흰 무늬의 원피스 차림으로 저 앞에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씩씩하고 거칠 것 없어 보이는 당당한 발걸음입니다. 그녀는 등 뒤에 작은 현악기가 들어 있는 듯한 알록달록한 줄무늬 가방도 메고 있습니다. 그녀의 환한 얼굴과 거침없는 발걸음을 보니 그녀도 우리만큼이나 이 여행이 설레는가 봅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예상보다 더 나이가 있어 보였으며, 우리는 젊은 축에 속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첫날의 흥분과 설레임 때문인지 승무원들도 좀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초두 효과(primacy effect)는 첫인상이 미치는 강력한 효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먼저 제시된 정보나 인상이 나중에 제시된 정보들을 해석하는 지침을 만들어 주거나 나중에 들어오는 정보들보다 기억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하지요. 이처럼 처음에 제시되었던 정보가 나중에 들어오는 정보들의 처리 지침을 만들고 전반적인 맥락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를 첫인상의 맥락효과(context effect)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초두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보고 듣는 정보를 본능적으로 일관성 있게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후기 정보에 주의가 줄어드는 주의 감소 때문이라고 합니다. 승객들이 긴 여정에 들어가는 첫날, 크루즈 선사는 초두 효과의 중요성을 아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친절’을 모토로 크루즈 선내에 첫 발을 딛기 전부터 친절을 폭풍 전파하고 있는가 봅니다. 치아를 활짝 시원하게 내 보이며 함빡 웃는 웃음은 기본이고, 웰컴 카드와 웰컴 드링크, 친절한 안내 등은 첫인상이 좋으면, 향후의 서비스와 경험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여행 내내 긍정적인 기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우리 방 청소와 연락을 담당할 필리핀 출신의 스튜어드가 우리의 캐리어를 방으로 전달해 주며 인사를 하는군요. 승선 경험이 풍부한 그는 얼핏 보기에도 노련해 보였습니다. 앞으로 110일간 움직이는 우리의 숙소가 될 방은 이전 크루즈에 비해 산뜻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중후한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 방으로 돌아와 가방의 짐을 풀어 정리하면서 첫날을 마무리했습니다. 화장대 겸 책상 위에 일기장을 꺼내 놓으며 빈 지면에 채워질 내용들을 궁금해하면서 승선의 기쁨을 다독였습니다.
내일 아침의 바다는 제게 넓은 마음을 거침없이 보여주겠지요. 혹시 밤중에 잠깐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살며시 다가오는 새벽 별의 환영 인사도 받을 수 있겠지요. 이번 여행을 통해 어떤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될지 기대도 하면서,
자 이제
34,000 마일, 6 대륙, 28개국, 41개의 기항지를 포함하는 미지의 바다로 나가는 첫 밤을 맞이합니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궁금해지면서,
굿 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