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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으로 읽는 자기 인식, 뉴욕

by 윤재

“ 어느 항로로 방향키를 돌려야 하는지 모른다면,

그 어떤 바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이 말처럼, 삶의 갈림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묻게 됩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가야 할지 몰라 답답할 때는 잠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잠시 자신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써 보세요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대부분 아마 과거의 행동과 자신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일반적 특성들을 적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평생 묻고 그 답을 알아가는 과정의 연속이 우리의 삶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결정짓는 2 개의 축인 사람/개인상황으로 분석하는 심리적 접근도 나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존재인 개인은 동기, 지식, 정서가 역동적으로 결합된 존재이며 동기, 지식, 정서는 서로 결합함으로써 이후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이끌고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동기는 개인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 연료와 같은 것이고, 지식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 개인의 관점을 의미하고, 정서는 태도보다 다양하고 복잡하며 강렬합니다.


의미치료를 제안한 실존주의적 입장의 오스트리아 신경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1905~ 1997)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보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인사가 더 적절하다고도 했습니다. 우리의 심리적 현실이 어떠한가에 초점을 두어 보자는 의미이겠지요.


나에 대한 심리학적 용어인 자기(self).

자기는 자신의 태도, 특질, 능력, 감정 그리고 신체 특성의 집합으로 자기에 대한 개념은 다양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Jung은 자기는 성격의 핵심이라고 했고, Erikson은 자아를 강조했고, Kohut은 사람들은 자기애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 욕구는 타인을 통해 만족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자기 개념은 개인의 기본적인 속성으로 독특하거나 전형적인 신념의 집합체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그린 그림,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정신적 고통이나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다양한 방어기제를 자신 모습 속에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자화상이란 용어는 라틴어 ‘protrajere’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그 의미는 끄집어내다, 밝히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이 어원이 오늘날 초상화를 그린다는 뜻의 ‘portray’가 되었다고 합니다. 즉, 자화상은 ‘자기를 끄집어내다, 밝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월간 미술에서 인용).


다양한 이견들이 있지만, 최초의 자화상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얀 반 에이크의 <남자의 초상, 1433>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남자의 초상>이지만 아마 자화상으로 추정하는 것이지요. 얀 반 에이크는 ‘일종의 명함’으로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상단과 하단에 있는 글자로 보았을 때. 이 그림 때문일지 모르지만, 그는 이후 많은 작품 의뢰를 받았다고 하니, 자기 PR의 대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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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에이크, <붉은 터번을 한 남성의 초상>, 1433, 런던 내셔널 갤러리




우리나라의 경우, 18세기에 그려진 <윤두서의 자화상>이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광좌, 강세황의 자화상도 심미적 안목이 뛰어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세밀하고 정교합니다. 형형한 눈빛은 매우 강력하게 상대를 빨아들입니다. 모자의 윗부분은 잘려 있지만 가는 선으로 세밀하게 묘사된 수염은 눈동자의 시선과 더불어 힘과 생기를 느끼게 합니다. 그의 자화상은 대한민국의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자화상에 표현된 비장미는 현실과 괴리감에서 나오는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의 표현이라고 평가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가풍을 이어 과거시험에 매진하여,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남 윤 씨 집안이 속한 남인 계열이 당쟁의 심화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남은 일생을 학문과 시서화로 보냈습니다. 1712년 이후 고향 해남 연동(蓮洞)으로 돌아와 은거하였으며,. 1715년(숙종 41)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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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자화상>, 1710,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윤두서는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로, 시 · 서 · 화에 두루 능했고, 실학을 추구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인물화와 말 그림에서 일가를 이루었고, 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풍속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윤두서는, 직접 쓴 화평(畵評)에서"그림 공부의 최종 목표는 도(道)"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림의 길이 워낙 지난하고 인정받기도 쉽지 않은 탓에 그랬겠지요. 도 닦듯이 그리는 그림이라, 성스럽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우리의 옛 그림을 배우려면 윤두서에서부터 출발하라는 조언도 했다고 합니다. 윤두서의 그림에는 실생활의 장면들을 담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윤두서가 새로운 회화 경향을 선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방대한 중국 서적의 독서 경험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역시 방대한 독서, 풍부한 지적 자료의 산출입니다. 그중 <석공공석도, 18세기 초>는 돌 깨는 작업을 묘사하는데, 서양 쿠스타브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 1949>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곁에 봄이 찾아올 것입니다.

윤두서가 살던 시대의 봄은 어땠을까요?

조선의 백성들에게 봄은 괴롭고 힘든 시기였죠.

당시 시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은 여인들이 나물 캐는 모습입니다.

봄철의 나물은 끼니를 때우는 고마운 구황식자재였습니다.

가파른 산등성이에서 허리 굽혀 망태기를 손에 들고 나물을 뜯으려는 여인과 아픈 허리 잠시 피고 주위를 살피는 여인을 묘사한 <나물 캐기, 채애도(採艾圖)>에는 어려운 삶을 사는 백성들에 대한 따뜻함과 연민이 묻어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을 보면 여인들이 캐려고 하는 나물은 '쑥'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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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 <나물 캐기>, 18세기 초, 고산 윤선도유물 전시관


윤두서의 <나물 캐기/ 채애도(採艾圖)>와 연상되는 시가 있습니다.


윤두서의 외증손인 정약용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다북쑥을 캐고 또 캐지만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로세

양 떼처럼 떼를 지어

저 산언덕을 오르네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흐트러진 붉은 머리털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눈물이 쏟아진다네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하략)...

----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 5, 채호 중에서





영화 <관상>은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계유정난은 계유년인 1453년에 있었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입니다.




















영화는 수양대군, 김종서, 한명회 등 역사적 실존인물과 조선 최고의 관상가라고 하는 가상의 인물 김내경, 한양의 기생 연홍 등 가상 인물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긴장감 있는 시나리오로 구성되었습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천재 관상가 내경.

“사람의 얼굴에는 세상 삼라만상이 모두 다 들어있소이다.!!!”라고 하지요.


영화의 마지막 대사 관상가인 송강호, 그는

“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봤을 뿐

바람은 보지 못했다.

파도를 일으키는 건 바람이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원인과 결과에서 인과 관계가 오도되지 않게, 본말이 뒤집히지 않게, 원인을 잘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올바른 인과 관계를 파악하려면 역시 독서의 힘, 지적 재산의 양에 근거해야겠지요.



관상은 과학일까요?

요즘 세간에는 ‘인상은 사이언스‘라는 말로 유명인, 정치인들의 인상을 평하는 말들이 있기도 합니다.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라는 말이 있지요. 겉표지만으로 책의 내용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관상을 보는 방법이 발전한 이유겠지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주의를 기울이는 곳은 그 사람의 얼굴입니다. 개인의 얼굴은 다양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우리는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의 성별, 나이, 정서 상태를 파악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내적 성향에 대해 추론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는 얼굴을 통한 추론과 판단이 일부 정확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Lin과 동료들은(2018) 선출된 관료들의 얼굴에서 유추된 특성이 그들의 불법 행위를 예측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일련의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이 연구자들은 실제 미국 정치인 얼굴 사진을 실험자극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중 절반은 뇌물 혐의로 기소가 되었던 정치인들이었던 반면 나머지 절반은 뇌물 관련 전과가 없는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실험자극으로 사용된 정치인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 참가자들은 정치인들의 흑백 얼굴사진을 연달아 본 다음, 다양한 특성을 유추해 보는 과제를 수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실험 참가자들은 비리를 저지른 ‘부패한’ 정치인과 뇌물 혐의가 없는 ‘청렴한’ 정치인들을 그들의 얼굴만을 바탕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참가자들에 의해 더 부패해 보이거나, 비윤리적인 사람처럼 보인다고 평가받은 사람들일수록 실제로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법적 처벌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지요. 이와 같은 결과들은 단 시간 동안 타인의 얼굴 정보만을 사용하여 내린 판단이 비교적 정확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결과들이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개인의 실제 내적 속성이 얼굴에 드러나고, 주변 사람들은 특정 얼굴 생김새로부터 이런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일까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에 전시되고 있는 자화상 일부를 보면서 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상처가 깊은 에드가 드가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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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자화상>, 1855-1856. MET



경력 초기에 에드가 드가(Edgar Degars, 1834~ 1917)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40여 점의 자화상을 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외모에 대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적 발전을 살펴보는 역할도 합니다. 이러한 유사성은 젊은 예술가가 Ecole des Beaux-Arts에서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이탈리아에 장기간 체류하기 위해 출발했던 1855~56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면을 살짝 비켜 바라보는 시선과 약간 처지 입술꼬리로 보아 슬픔이랄지 우울이랄지 만족스럽지 않은 정서가 전해집니다. 왼쪽과 오른쪽 얼굴의 빛의 반영이 다르게 표현되어 이중적인 내면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드가의 초상화에 슬픔이 묻어 있습니다.


‘발레의 화가’라는 별명답게 무용수 그림으로 유명한 에드가 드가는 조각을 포함한 다양한 모드와 소재로 작업했으며, 최근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에드가 드가는 1834년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금융업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아버지 역시 유능한 은행인으로 명성이 높았지요. 어머니는 유럽계 혼혈 여인으로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능력 있는 아버지와 매력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행복하게 자랄 수 있었으나 어머니가 불륜을 저질렀고 그 상대는 아버지의 남동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고통스럽지만 기를 쓰고 못 본 척했답니다. 가정에 매우 소홀했던 어머니가 드가의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을 부추겼다는 추론도 있습니다. 아동기 자녀의 인성 형성에 어머니는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기질적으로 예민한 아이라도 온전히 받아주는 안정적이고 신뢰로운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게 되면 원만하고 긍정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됩니다. 낙천적인 아이라도 예민하고 까칠한 어머니 밑에서 성장할 경우는 소심하게 자라거나 관계에 있어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성향을 갖기 쉽습니다. 애착과 기질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그러한 결과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드가가 13살 때 어머니는 요절하고 아버지는 마음의 끈을 놓아버렸고, 아버지의 고통이 전염되고 어머니에 대한 미움의 고통 속에서 드가는 어머니를 평생 증오하고 환멸하고 저주했답니다. 13세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드가를 데리고 미술품 수집가들을 만나러 다니거나 루브르박물관을 자주 방문해 아들이 어린 나이부터 미술과 가깝게 지낼 수 있게 했습니다. 드가는 가업 계승을 위해 법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 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으나 포기하고 파리 국립미술학교로 진로를 변경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화가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고 초년에 예술가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때에도 기다려 주었다고 합니다.


1855년, 드가는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 1867)의 제자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초기에 고전주의 미술에 매료되어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보며 공부를 많이 했고, 특히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선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는 앵그르의 조언을 받아들여 데생 연습을 꾸준히 했고, 1860년대까지 르네상스 시대와 고전 작품을 700점 이상 복제했다고 합니다. 드가가 인상파 화가들과 공유한 것은 선을 중시한 앵그르의 고전주의와 색채를 중시한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에 맞서 자신들만의 독창적 화풍을 개척하려 한 데 있었으며, 실제 드가 자신은 스스로를 쿠르베의 전통을 계승한 ‘사실주의(realism)’ 화가로 규정했습니다.


보스턴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드가의 어린 무희 조각상을 보았습니다. 1881년, 파리에서 열린 여섯 번째 인상파 전(展)에 드가는 조소 '14살의 어린 무희'를 출품했습니다. 마리 반 괴템을 모델로 한 그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지요. 작품은 너무나 생생해서 모델인 진짜 마리 반 괴템이 전시장에 온 듯했습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빙글빙글 돌 것 같았지요. 꿈을 꾸는 듯한 두 눈, 고집스러운 입, 가만히 비를 맞는 양 치켜든 턱, 앳된 상체, 빈약한 두 다리의 이 조소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는데 심지어 비단 리본을 머리에 묶고, 딱 맞는 발레복을 입고, 토슈즈까지 신었습니다. 딱히 예쁘지도 않은, 그간 본 적 없는 조소, 진짜 생명력이 깃든 조각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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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어린 14살 무희>, 1878-1881, M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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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어린 14살 무희>, 1878-1881, 보스턴미술관


(조각상에 있는 스커트는 가끔씩 교체해 준다고 합니다.)



베르트 모리조, 메리 카사트, 수잔 발라동 등 여성 화가들을 적극 지지하고 화가로 활동할 수 있게끔 도운 이도 들어가였습니다. 논쟁적인 드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며, 예술가는 주제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고 가져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믿었답니다.


"여자의 수다를 듣느니 울어대는 양 떼와 있는 게 낫다"라거나"대체 아내가 왜 필요한가. 아침에 부스스하게 깨선 밤새 작업한 내 그림을 보고 '정말 잘 그렸네요!'라는 입에 발린 말이나 하는 것 말고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나"라는 말도 한 적 있듯, 드가가 여성을 멀리하며 독신으로 산 것도 어머니를 향한 혐오가 여성 전체로 일반화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예술가는 혼자 살아야 하고, 그의 사생활은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라는 자신의 이 철학을 고수했지 거 합니다. 말년을 맞은 드가는 거의 실명한 상태로 파리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하는데, 끝까지 그와 함께 했던 르누아르마저 그의 고집에 지쳐 왕래를 끊었다고 하네요. 드가는 1917년, 83살 나이로 고독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삶이 곧 자화상, 렘브란트 자화상

렘브란트 판 레인(1606~1669은 평생 헌신적인 자화상 화가였으며, 그가 그린 자화상은 90점(또는 100점)이 넘지만 현재 약 40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부인의 죽음과 경제적 파산으로 활력을 잃어가는 렘브란트가 54세 때 그린 이 그림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얼굴에 나타나는 이마의 잔주름 같은 노화의 징후를 아낌없이 묘사했으며, 주름진 눈썹, 눈 밑의 무거운 주머니, 그리고 이중 주름을 표현하기 위해 높은 부조로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암갈색 계통의 어두운 색을 사용해 전체적으로 가라앉는 침잠의 느낌을 줍니다. 관람객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담담한 고뇌가 담겨 있고 꽉 다문 입에서 결기마저 전해집니다. 얼굴에 비해 크게 그려진 챙이 없는 커다란 베레모 형태의 모자가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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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판 레인, <자화상>, 1660, MET





거리 두기, 메리 카사트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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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카사트, <자화상>, 1878, MET



메리 카사트(Mary Cassatt)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가 그녀를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전시하도록 초대한 지 1년 후에 이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특이한 황록색 배경, 대비되는 보색에 대한 관심, 인물의 대담하고 캐주얼한 비대칭 포즈는 드가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비스듬한 자세에서 관습적이거나 전형적인 것을 따르지 않으려는 그녀만의 자율성, 독자성이 엿보입니다. 눌러쓰지 않고 뒷머리에 살짝 비스듬히 걸치듯 쓴 모자에서 '그래서, 뭐?' 하는 듯 약간의 반항기 같은 것도 전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삶을 알고 자화상을 보아서인지 이미 그림을 만나는 것에 일종의 선입견이 전제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내 뜻을 아시겠나요? 에곤 실레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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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자화상>, 1911, MET



Egon Schiele(1890~ 1918)의 삶은 짧고 강렬했으며 놀랍도록 생산적이었습니다. 세기말 유럽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인 에곤 실레는 28세에 스페인 독감을 드라마틱한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젊음의 고독과 욕망을 가장 탁월하게 표현한 작가가 실레여서 젊은이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며 “막 입학할 때는 고흐나 고갱을 좋아하던 미술대학 신입생들도 졸업할 때는 클림트와 더불어 에곤 실레를 최고의 작가로 꼽는다”라고 말했답니다.


스페인 독감에 걸리기 전까지 그는 300점이 넘는 유화와 수천 점의 작품을 종이에 그렸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실레에게 그림과 소묘 모두에서 가장 강력한 주제를 제공했습니다. 1910년에서 1918년 사이에 제작된 그의 대규모 수채화와 그림 시리즈의 자화상(이 작품이 대표적인 예)은 고통스럽고 심리적으로 복잡한 이미지입니다. 뼈가 앙상하고 각진 작가의 수척하고 고문당한 모습은 흔들리는 연필 선으로 드러나는 내면의 긴장감으로 곤두서고 주변의 아우라를 흰색으로 칠합니다. 쉴레는 크고 검은 눈을 위협적으로 빛내며 입을 벌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꼿꼿이 세운 채 사납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포즈에서 그의 팔은 어색하게 내밀어져 있고 팔꿈치는 날카롭게 구부러져 있다. 색상은 갈색 음영으로 단순하게 제한되며 신체의 특정 부위(입, 유두, 배꼽, 생식기)만 빨갛게 묘사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괜찮습니다. 호레이스 피핀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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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 피핀, <자화상>, 1944, , MET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웨스트 체스터 출신으로 흑인 노예 가정에서 태어난 호레이스 피핀(1888~1946)은 변변한 미술용품도 없이 검정 숯으로 자신이 본 동물, 사람, 풍경 등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그려냈습니다. 가난한 환경 탓에 공식적인 예술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세련되고 현대적인 색상과 단순한 형태로 그렸으며 미국판 앙리 루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주도적 학습과 전쟁의 참상을 목격,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처 노력을 기울였고, 그는 목재 패널로 작업을 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피핀은 오른팔이 영구적으로 장애를 입은 전투 경험을 회고록에 쓰고 삽화를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받쳐 들고 붓을 잡고 그렸습니다. 그는 전쟁과 인종차별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1930년대에 그는 나무 패널에 디자인을 불태우고 미술계에서 준비된 청중을 찾을 수 있는 그림을 그렸으며 그 당시에는 독학한 화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1946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필라델피아,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카고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중요한 현대 미술 연례 대회에서 상을 받았으며 국내 및 국제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130점 정도의 그림 대부분을 판매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그를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흑인 화가”라고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역경에도 불구하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그의 강인한 회복탄력성에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현실을 뛰어넘어 그곳엔, 레오노라 캐링톤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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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노라 캐링턴, <초상화, The Inn of the Dawn Horse>, 1936, MET


풍성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하얀 바지를 입고 푸른색의 빅토리안 의자에 앉아 있는 레오노라 위로 유년기에 사용했을 법한 하얀 목마가 창 밖으로 날아가려 합니다. 창 밖 푸른 잔디 위에는 하얀 말이 자유롭게 질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레오노라 앞에는 검은색 바탕에 겨자색 줄무늬를 한 하이에나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요. Carrington은 어린 시절을 동물들로 둘러싸인 시골 사유지에서 보내며 동화와 전설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성인이 되었을 때 이러한 기억을 재검토하여 실제 생물과 상상 속의 생물이 가득한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말은 낮의 부활을, 하이에나는 밤의 심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유난히 뾰족한 검정 구두와 가녀리고 긴 손은 아마도 그녀의 예민함 또는 내재한 공격성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물, 신화, 상징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 1917~2011)은 영국 태생의 멕시코 귀화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소설가이며, 1970년대 멕시코 여성 해방 운동의 창립 멤버입니다. 영국 클레이튼 그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플로렌스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나중에 런던의 첼시 미술 학교에 다녔습니다. 런던으로 돌아온 동안 그녀는 전시회를 위해 영국을 방문하는 수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을 만났습니다. 어린 시절 아일랜드계 유모로부터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전설과 신화를 들으며 성장하여,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야생의 감각과 환상, 유령들은 이후 그녀가 그림을 그릴 때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의 뮤즈가 될 시간도 없었다. 나는 가족에게 반항하고 예술가가 되는 법을 배우느라 너무 바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누군가가 내 작품을 전시하거나 살 것이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자화상에 묘사된 하이에나는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통합하여 밤과 꿈의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석합니다. 캐링턴이 초현실주의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살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한 권의 책-영국 출신 무정부주의자로 후에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로도 재직한 허버트 리드(Herbert Read)의 초현실주의 예술에 관한 것- 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초현실주의 예술론의 대가인 독일인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의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보고 난 뒤, 우연히 어떤 파티장에서 그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무려 25살 나이 차이가 나고 막스 에른스트에게는 부인이 있었는데도...

위 자화상은 막스 에른스트의 도움과 조언으로 완성한 것이며, 그녀는 "막스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 문학, 예술, 모든 것을 그가 가르쳐줬다.”라고 했습니다. 그 불같이 뜨거운 사랑이 오래 지속되면 좋으련만 그도 잠깐이어, 이별 후 한동안 레오노라 캐링턴은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녀는 활발한 창작으로 그녀의 작품 <여성 거인>은 2009년에 150만 달러에 낙찰되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는 단명한 초현실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등과 같은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그림 속에 살며시 끼워 넣거나, 자화상으로 표현하며 자기를 드러냅니다. 화가의 자화상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대상황 속의 사회적 자아를 표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의 자의식이나 욕망 등의 심리상태나 가치관 등을 드러냅니다.



윤동주 시인은,

"우물 속에 한 사나이가 있고,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가지만...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지고,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는데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진다"고 하면서 자화상을 엮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다양한 모습의 자아를 거부하기보다는 온전하게, 안전하게, 성숙하게 통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나 어지러운 세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림은 각자 익숙하게 사용하는 자신만의 언어입니다. 불투명한 마음에 맑은 물을 붓는 작업의 하나로 그림을 통해 직관적인 감각 수준에서 이해하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또한 길을 잃더라도 그림 속에서 방향과 속도를 다시 찾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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