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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화 가지 휘어잡고 주저앉다

by 윤재


양현은 별당으로 뛰어들었다. 서희는 투명하고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고 푸른 해당화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중략)...


”일본이, 일본이 말이에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p.44

--김민철, 『꽃으로 토지를 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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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저 『꽃으로 토지를 읽다』는 저자의 다른 저서를 읽다가 만난 책입니다. 『꽃으로 토지를 읽다』의 저자는 그 『토지』에 나오는 주요 인물과 꽃을 연결 지어 인물들의 특성을 더 탄탄하고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수고에 무임승차하며, 꽃으로 소설을 읽는 재미도 아주 쏠쏠합니다.



박경리 님의 『토지』는 5부 20권으로 엮어진, 1897년부터 1945년의 시간을 중심으로 경남 하동 평사리에 있는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600여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대하소설입니다. 21세기에도 남을 한국소설의 고전이라는 제목의 설문조사에서 단연 1위를 차지한 소설이 박경리 님의 『토지』로 꼽혔다지요.



학교라는 정규 교육체계를 벗어난 지 오래되었고, 일의 영역에서도 은퇴한 지금.

나름 한 해 또는 한 학기 자율 학습의 과목을 정해놓고 진행하고 있는데, 올해는 대하소설과 우리의 근현대사를 학습하는 것을 주제로 정했습니다. 아마 이 과목은 내년까지 이어질 것 같습니다.



해당화꽃은 장미과(Rosaceae)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 주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자생하며 바닷가 모래밭이나 언덕에 주로 자생합니다. 추위와 공해에 잘 견디며 내건성도 강하다고 하는군요. 햇빛을 많이 받는 곳이 좋으며 토질은 자생지가 모래사장이지만 양토에도 잘 자란다고 하며 내한성도 좋고 바닷바람에도 강하다고 하니 『토지』의 주인공 서희를 그릴 때 등장할 만한 꽃인 것 같습니다. 꽃말은 ‘이끄시는 대로’,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연인의 숨결’ ‘그리움’, ‘원망‘, ’ 미인의 잠결‘ 등 의미가 헷갈리게 다양합니다. 아름다운 꽃과 향기로운 향으로 인해 정원수나 관상용 식물로도 많이 이용됩니다. 낙엽관목으로 키는 약 1~2m 정도까지 자라고 줄기에는 가시가 많다고 합니다.


가시 많은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니, 고운 서희의 손에 상처가 나지 않았을는지요...


한 송이의 꽃이 2~3일 정도 피어 있다가 지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꽃이 피어나 오랜 기간 동안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 꽃 인심이 좋은가 봅니다. 해당화꽃은 아름다운 외형뿐만 아니라 강한 생명력과 다양한 효능을 지닌 귀중한 식물입니다. 관상용으로도 좋고, 약재나 차로 활용하면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다재다능한 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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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월간가드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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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최참판댁 별당에 핀 해당화 (사진 출처: 하동군)




표암 강세황(1713~1791)은 단원 김홍도(1745~?)의 스승이며, 개성 지역을 유람하고 제작한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의 화가로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문인화가입니다. 강세황이 살았던 조선 18세기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며 문예가 활짝 꽃피었던 시기이지요 영·정조 연간의 안정된 치세를 배경으로 도시가 발달하고, 세상을 보는 눈과 생활양식이 빠르게 바뀌어 갔던 역동적인 시대였습니다. 지식인들은 서양 문물을 포함한 새로운 지식과 경험에 눈떴고 개성이 가득한 저술과 예술 작품을 창출하였습니다. 표암 강세황은 예술에 대한 재능과 열정, 지적인 탐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시詩·서書·화畫 세계를 일구었으며, 문예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안목으로 비평가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활발한 활동과 탁월한 안목은 임금에서부터 말단의 화원, 재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문예를 매개로 신분과 지위를 넘나드는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개별적 교유交遊를 넘어, 함께 예술의 지향을 공유하는 물줄기가 되었습니다. 강세황은 18세기 예술계의 역동을 이해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화가입니다.(출처: 박물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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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해당화도> 조선 18세기



<해당화도(海棠花圖)>는 문인화의 격조와 독창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조선 후기 회화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강세황은 이 꽃을 섬세하면서도 활달한 필치로 묘사하여 자연의 생동감을 극대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전통적인 사군자 화풍을 따르면서도, 서양화법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일부 적용하여 꽃과 가지에 입체감을 부여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강세황이 새로운 회화적 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의 여백은 자연을 상상하고 사색할 여지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님(1879~ 1944)은,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 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습니다 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라고 시집 <님의 침묵, 1926>에서 해당화를 지었습니다.



해당화가 피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약조를 한 임을 기다리는 그리움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임이 떠나가며 해당화가 피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봄이 어서 오기를 기다렸음을 전합니다. 애절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납니다.

그렇지만

만해 한용운의 시 <해당화>는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가 아니라,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기다리는 애절한 마음을 담은 작품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봄이라는 계절적 배경을 통해 독립을 염원하는 기다림과, 그 기다림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공허함을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시의 초반부에서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은 단순한 개인적 기다림을 넘어 조국의 독립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봄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정작 봄이 오고 나니 그것이 너무 이른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심정은 조선의 해방을 염원하면서도 그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직감하는 불안과 맞닿아 있습니다.


중반부에서 등장하는 ‘철 모르는 아이들’은 아직 현실을 깨닫지 못한 순진한 대중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해당화가 피었다고 기뻐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외면하는군요. 이는 독립의 기운이 감돌지만, 여전히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야속한 봄바람’이 해당화를 시인의 앞에 놓았을 때, 그는 꽃을 주워 들며 묻습니다. ‘너는 언제 피었니’라는 질문은 해방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의 혼란과 감격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마지막 구절에서 ‘꽃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라는 표현은 특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군요. 이는 눈물로 인해 번져 보이는 꽃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독립을 향한 염원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해당화는 단순한 자연물의 일부가 아니라, 조국을 위한 시인의 뜨거운 눈물과 그리움을 투영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 시는 단순히 기다림과 그리움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 속에서 독립을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해당화를 통해 조국의 봄을 기다리는 자신의 심정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했으며,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독립을 기다리는 조선인들의 간절한 마음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해당화>는 개인적인 감성을 넘어 민족적 염원을 담아낸 깊이 있는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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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해당화>, 1944



'조선의 보물', '화단의 귀재'라는 격찬을 받았던 이인성(1912~ 1950) 화가의 그림 <해당화>입니다. 가난했으나 지인들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서, 반 고흐, 폴 고갱 등 인상주의 화풍을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낸 화가 이인성은 한용운 시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합니다. '고갱은 알아도 이인성을 모른다'는 말처럼 무명으로 묻혔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이 그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개최하면서 요절한 그의 생애와 작품이 '향토적 서정미를 정착시킨 조선의 고갱'으로 다시 평가되었습니다.


늦었지만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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