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봄이면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고
겨울에는 뒷산에 눈이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고니가 떠다니는 호수는 바라지 않지만
여울에 지붕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면 좋겠네
아침기도가 끝나면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고
못다 읽은 책을 읽으면 좋겠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음의 물결에서 벗어나
적막이 들판처럼 펼쳐진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자작나무들과 이야기하고
민들레꽃과도 말이 통하면 좋겠네
다람쥐 고라니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네
낮에는 씨감자를 심거나 남새밭을 일구고
남은 시간에 코스모스 모종과 구근을 심겠네
고요에서 한계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단풍 드는 잎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나무들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곳에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면 좋겠네
울타리 밑에 구절초 피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굽은 길이면 좋겠네
추녀 밑에서 울리는 먼 풍경 소리 들으며
천천히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
짐을 조금 내려놓고 살았으면 좋겠네
밤에는 등불 옆에서 시를 쓰고
그대가 그 등불 옆에 있으면 좋겠네
하현달이 그믐달이 되어도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듯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묻지 않으며
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이 나를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벽난로의 연기가 굴뚝으로 사라지는 밤하늘과
나뭇가지 사이에는 뜬 별을 오래 바라보겠네
--도종환, 『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2016, 중에서
유난히 길고 춥고 불안정했던 겨울이 드디어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혼탁하고 칙칙했던 그 불안정을 씻어 내려는 듯 촉촉하게 비가 내렸습니다. 어제는 봄의 산길을 걸었습니다. 다른 어느 때와 다르게 그 산책길이 가볍고 여유로웠습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이 어느 정도 내려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도종환 시인의 문장들이 다가왔습니다.
도종환의 시 〈나머지 날〉은 삶의 끝자락에서 진정한 평화와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도종환(1955~ ) 시인은 중등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쓴 <접시꽃 당신>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정계 입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 〈나머지 날〉을 읽고 나면, 마음 한편이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를 보는 것처럼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화려한 찬란함보다 사소한 고요를 택하고, 소유보다 존재의 깊이를 택하는 이 시는, 우리가 잊고 살아온 ‘삶의 본질’로 천천히 되돌아가게 만듭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되돌아가고 싶게’ 만듭니다.
이 시는 집 한 채에서 시작합니다. 단순한 구조물이 아닌, 삶의 태도를 상징하는 ‘이층집’. 고립된 곳에서, 그러나 뿌리 깊은 평화를 담은 공간.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는 계절을 기다리고, 뒷산에 눈이 내리는 겨울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공간. 이 집은 시인의 상상 속 이상향이자, 궁극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겠지요. 특히 “고니가 떠다니는 호수는 바라지 않지만 / 여울에 지붕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면 좋겠네”라는 구절은, 사치스러운 낭만이 아닌 소박한 정서, 꾸며내지 않은 진심이 얼마나 더 깊은 감동을 주는지 보여주는군요. 이 시는 무엇을 갖고 싶은가 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은 이 시의 중심입니다.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나무들처럼, 치우침 없이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교류. 자작나무, 민들레, 다람쥐, 고라니와 같은 생명들과의 나직한 공존. 시인은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한, 평화로운 하루’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저 거기 그대로 있는 존재로 충분한 삶이겠지요.
그리고 마지막 연은 거의 기도의 형식에 가깝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등불 옆에서 시를 쓰고, 그대가 그 옆에 있는 장면. 하현달이 그믐달이 되어도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듯”이라는 대목은, 이해보다는 수용을, 통제보다는 놓아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우리는 종종 삶의 끝에서야 깨닫게 됩니다. 남기고 가는 것보다, 다 비우고 가는 것이 더 고요하고 찬란하다는 것을 마무리에서 알게 되는 것이지요.
도종환 시인은 이 시에서 ‘은퇴 이후의 삶’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을 사는 우리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치열한 경쟁과 빠른 변화 속도에 휘둘리는 이 도시의 삶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주 ‘굽은 길’을 걷고 있는가.
얼마나 자주, 등불 옆에 앉아 자신을 돌아보는가.
<나머지 날〉은 단지 남은 인생을 살아내는 방법에 대한 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시로 다가왔습니다. 그 물음은 고요하지만 강하고, 조용하지만 단단합니다. 그래서 이 시는 삶의 가장 단순한 진실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삶의 마지막에 남는 것이, 결국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실로.
요즘처럼 매일매일이 시끄러운 날들 속에서, 도종환의 〈나머지 날〉을 읽는다는 건 마치 가슴에 작은 숲 하나를 들이는 일 같습니다. 말보다 감정이 먼저 움직이고, 판단보다 피로가 앞서는 시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규정하려 하고, 함께 걸어가기보다는 진영을 나누며 등을 돌리는 사회. 이런 지금, 이 시는 조용히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이런 세상이 전부는 아니라고.”
시인은 말하는군요,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봄이면 꽃이 피고, 겨울엔 뒷산에 눈이 내리는 곳. 고니가 떠다니는 화려한 호수는 아니더라도, 여울에 지붕 그림자가 비치는 그런 소박한 자리. 이것은 단지 자연 속 삶에 대한 판타지가 아닙니다. 모든 게 크고 빠르고 시끄러워야만 의미 있다고 강요받는 세상에서, 작고 느리고 조용한 삶도 온전히 의미 있다고 말해주는 선언으로 다가옵니다.
이번 겨울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립과 혐오, 반목의 언어들이 스크린 밖으로 치열하게또는 간절하게 터져나왔지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상대는 점점 적이 되어가고. 그 겨울이 끝나가고 다시 새 봄이, 이 시처럼 말없이 들판처럼 펼쳐진 적막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자작나무들과 이야기하고, 민들레꽃과 말이 통하는 세계. 다람쥐, 고라니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하루가 평화로울 수 있는 세계.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요. 하지만 동시에, 이 시는 그저 이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삶을 꿈꾸게 되었는가."
그리고,
"왜 그 꿈이 이토록 간절한가. “
울타리 밑에 구절초가 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굽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결국 곧은 길만이 정답이라 강요하는 세태에 대한 작고도 낮은 주장처럼 느껴집니다.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나무들 사이에서 살고 싶다는 구절은,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균형과 중심임을, 조용히 일깨웁니다.
무엇보다 가장 깊은 울림은 마지막 연에서 옵니다. 짐을 조금 내려놓고, 등불 옆에서 시를 쓰고, 그대가 그 등불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고백. 이는 결국 '사람'에 대한 바람이겠지요. 함께 불빛을 바라보며, 묻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 정치와 세상의 언어들이 점점 분열과 소외로 치닫고 있는 이때, 이토록 조용한 연대와 따뜻한 공존을 꿈꾸는 시인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 강하게, 더 또렷하게 다가옵니다.
이 시는 ‘남은 날’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 이 순간부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묻고 있는 듯합니다. 더 이상 세상의 중심에서 모든 걸 쥐려 하지 말고, 한걸음 뒤에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살아가자고. 우리 모두 그 굽은 길 끝에서, 조용한 등불 하나를 나눌 수 있기를, 시인은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 고요한 시 한 편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지금, 이토록 소란스러운 시간 속에서, 그 굽은 길을 걷고 싶다고....
도종환 시인의 시 〈나머지 날〉처럼,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그 속에는 삶과 자연,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가 녹아 있는 그림, 진경산수의 거장,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정선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이전까지 중국의 화풍을 모방하는 데 치중하던 조선 화단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즉 실제 한국의 자연을 그리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습니다. ‘정선의 산수화들은 정치적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또한 문화사적으로 근대화의 진행을 맞이하는 가운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발견(發見)’된 그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 고연희는 그의 저서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정선은 사대부로서 유교적 교양과 문인의 감성을 지녔지만, 화가로서의 길은 실경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우리 산하의 참모습을 포착하는 여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금강산, 묘향산, 북한산 등 수많은 명승을 직접 그려냈고, 그의 그림은 ‘이 땅의 산수’를 처음으로 ‘우리의 미의식’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중에서도 ‘인왕산의 비 갠 모습’인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는 겸재 정선이 남긴 가장 서정적이면서도 철학적인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정선, <인왕제색도> , 138.2x79.2cm, 175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216호
높이 338m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인왕산은 조선의 수도 한양의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인왕산 근처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던 정선은 큰 종이 한 장을 그대로 사용해서 웅장한 바위산을 그림 속으로 옮겨 담았습니다. 그에게 인왕산은 일상의 공간이었던 것이지요.
지루하고 긴 장맛비가 갠 후, 바위산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구름은 조용히 걷히기 시작합니다. 물안개 가득한 공기 속엔 아직 물기 어린 냄새가 감돕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바로 그 ‘사이의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단순히 산을 묘사한 풍경화가 아니라, 비 오는 날 인왕산의 모습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붓을 든 그림입니다. 즉, 이 그림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장면을 그린 것으로 멀리 있는 산 봉우리와 바위, 먹물의 농담 차이로 깊고 먼 원경과 눈앞의 집 묘사가 생생한 현장감도 느끼게 해 줍니다. 큰 붓으로 겹겹이 힘 있게 내리그어 커다란 벽돌을 연상케 하듯 빗물을 머물고 있는 바위를 강렬하고 단순하게 묘사했습니다. 안개와 소나무 사이에 집 한 채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보다 이 집에서는 인왕산의 전경이 더 눈에 잘 들어올까요. 너무 가까이 있으면 때로 전체를 바라보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적절한 마음의 거리 두기가 절실한 요즘 이 그림 속의 이야기들이 더 궁금해집니다.
단순하고 대담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는 그림 속 화면 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산은 거대하고 단단하지만, 그것을 감도는 안개와 구름은 부드럽고 유연합니다. 한양 성곽의 모습까지 점으로 섬세하게 묘사한 이 그림은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비와 수직과 수평의 조화, 강인함과 여림이 이 한 장의 화면 안에 절묘하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연이 가진 이중적 속성,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산기슭을 감싸 안은 먹빛은 뚜렷한 윤곽으로 경계를 짓는 대신, 번지듯 스며들며 모호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데, 바로 그 모호함이 이 그림의 아름다움으로 전가됩니다. 마치 인생의 오늘도 내일도 모호한 것을 연상하게도 합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경계보다, 때로는 안개처럼 흐릿한 시간들이 마음에 오래 남고 반추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정선이 즐겨 사용한 호 ’ 겸재 謙齋‘는 ’ 자신을 비워서 낮춘다 ‘는 뜻이라고 하는데, 그림 속 안개로 표현된 여백이 무거운듯한 바위 봉우리를 가볍게 받치고 있는 듯합니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의 그림 중 가장 ‘침묵에 가까운 그림’으로 보입니다.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그 안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정선은 단지 산을 그린 것이 아니라 비가 그친 후의 적막, 다시 시작될 시간의 숨결,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경계선을 그려낸 것으로 어쩌면 정선이 꿈꾼 이상향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심 속 갈등과 분열, 혼탁한 정치와 속도를 강요하는 삶 속에서, 이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멈추고 바라보게 되는 시간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속삭이듯 다가오는 한 줄기 바람 같은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제 마음 가득 내리누르던 바위도 걷혔으니, 정선이 살았던 그 거리들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지금 여기가, 조용한 평화다.”
그가 보았던 시선으로, 그가 느꼈던 마음으로, 나머지 말들을 새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