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이 숫자 하나에 담긴 시간의 무게가 저에게는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부부로 함께한 날들이 어느덧 네 계절을 수십 번 넘고, 함께 한 발걸음은 삶이라는 여행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시간의 의미를 조용히 되새기며, 우리는 짧은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가방을 꾸리며 혹시나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어느새 짐은 무거워졌고, 막상 여행지에서는 쓰이지도 않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내 마음속도 그렇지 않을까. 두려움과 조바심, 지나간 후회의 조각들, 언젠가 필요할 것만 같아 품고 있었던 말 못 할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를 짓누르는 ‘불필요한 짐’일지도 모른다고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마음은 풍성해졌지만 몸은 묘하게 무거웠습니다. 낯선 공기를 마시고 돌아온 날의 피로함인지, 삶의 리듬으로 다시 돌아가는 문턱 때문인지, 하여 오랜만에 낮잠을 청했습니다.
낮잠 후, 다정한 분이 선물해준 책을 펼치다 정호승 시인의 시 <마음이 가난해지면>을 만났습니다.
정호승
마음이 가난해지면 지옥도 나의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마음이 가난해지면
비 온 뒤 지옥에 꽃밭을 가꾸기로 했다
채송화 백일홍 달맞이꽃을 심어
마음이 가난해질 때마다 꽃 한송이 피우기로 했다
감나무도 심어 마음이 배고플 때마다
새들과 홍시 몇개는 쪼아 먹기로 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지옥의 봄날도 나의 것이다
지옥에 봄이 오면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기에
죽어도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기에
지옥에 텃밭도 가꾸기로 했다
상추 고추 쑥갓 파 호박을 심어
호박잎에 저녁별을 쌈 싸 먹을 때마다
마음은 더욱 가난한 흙이 되기로 했다
흙을 뚫고 나온 풀잎이 되기로 했다
--정호승, <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 , 2022 중에서
시의 첫 구절은 마치 조용한 물결처럼 마음을 덮어왔습니다.
‘가난해진다’는 말이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더 갖지 않으려는 마음, 더 사랑하려는 마음.
소유가 아닌 비움으로, 조급함이 아닌 여유로, 잎이 진 가지 끝에서 다시 피어나는 새순처럼, 마음도 그렇게 가난해져야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시인이 전해줍니다.
마음이 가난해질 때마다 꽃 한송이 피우고,
굶주릴 때마다 홍시 몇 개를 새들과 나누며,
지옥마저도 봄날처럼 살아내려는 그의 시심은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호박잎에 저녁별을 쌈 싸 먹을 때마다
마음은 더욱 가난한 흙이 되기로 했다" 라면서...
연약하지만 꺾이지 않고, 고요하지만 생명을 품는 흙처럼— 비가 지나간 자리에 꽃을 심는 일.
마음이 힘들고 고단할 때, 그저 피워내는 것이 아니라 가꾸기로 한 그의 다짐에 나도 마음을 빌려봅니다.
내 안의 지옥 같던 시간에도 작은 꽃 한 송이, 삶의 의미를 심어보는 거지요.
우리는 이제,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더 많이 사랑하려 합니다.
흙처럼 낮고, 풀잎처럼 여리지만,
꺾이지 않고 살아내며, 다시 피어나는 날들을 향해.
그게 바로,
부부로 함께한 40년이 가르쳐준 삶의 방식입니다.
이제
조용히
겸손히
— 다시 마음이 가난해질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