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엄마의 이삿날

빨리가서 선점해야돼!

by bony

Z엄마는 우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왕언니이다. 언니는 우리가 다양하게 별명을 지어주었다.

맥가이버처럼 뭐든지 뚜딱뚜딱 잘 고쳐서 붙여진 별명 "공대생 아름이", 왕년에 이승연을 닮은 외모로 컴퓨터, 요리, 글짓기, 자녀교육, 각종 프로그램 다루기 등등 못하는 것이 없어서 붙여진 별명 "미스코리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언니"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언니도 우리 모벤져스의 공통점인 빙구미가 있다.

언니는 우리보다는 빈도수는 적지만, 가끔 카드를 어디에 놓고 온다거나, 커피를 마실 때 빨대에 머리를 박거나, 오메기떡을 오메가떡이라고 하는 말실수 같은 것도 하곤 했다.


그런 언니가 오늘은 김포로 이사를 가는 날이다.

언니가 이사를 가는 것은 슬프지만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시 곧 볼 것을 알기에 아주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또한 우리 중에 가장 기계를 잘 다루는 언니가 이사를 가게 되어서 H엄마와 나는 우리의 삶의 질이 확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한 번은 H엄마와 내가 아이들 논술수업시간에 필요한 영화 DVD를 얻기 위해 DVD가게를 무작정 찾으러 다닐 때, 언니는 넷플릭스로 다운로드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언니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동네 어디에도 없을 DVD가게를 찾아 헤맬 뻔했다. 나도 기계치이지만, H엄마는 더 심해서 H엄마의 언니에 대한 의존도는 더 높았다.


또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H엄마의 하얀 승용차, 일명 "이쁜이"가 주차장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고 있었다. 이쁜이가 고장 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H엄마는 나를 불러 같이 자신의 이쁜이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자고 했다.

"언니, 나랑 같이 동네 한 바퀴 돌자! 내가 차 태워줄게!" H엄마가 나를 꼬셨다.

"그런데, 우리 이쁜이는 몇 년 넘게 주차장에 있어서 어떻게 시동이나 걸릴지 모르겠어!, 그리고 내가 운전을 잘할 수 있는지 걱정이 되네!"

"뭐어....!!!"

"언니, 나 믿지? 뭐 괜찮을 거야?"

"난 안 괜찮은... 데..."

"아잉~~! 같이 가자! 여기 동네는 내가 잘할 자신이 있어. 고속도로나 송도 쪽은 무섭지만, 내가 얼마나 많이 동네를 왔다 갔다 했는데, 아이들 어린이집에 데리러 잘 다녀왔어. 약 5년 전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H엄마와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다시 한기가 느껴졌다. 지옥의 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어두운 주차장에 우리 둘밖에 없었다. 멀리서 하얀 승용차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랫동안 세차도 하지 않아 보였다. 차에 때가 시커멓게 타 있었다. H엄마는 민망했는지 맨 손으로 차 표면의 먼지를 털어냈다. 바퀴 부분에 거미줄 같은 것도 있는 듯했다.

정말 도망가고 싶었다. 어디 멀리... 여기서 뛰면 곧 H엄마가 나를 따라잡겠지...

그런데 이런 내 맘을 아는지 H엄마는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궁예처럼 나의 마음을 꿰뚫는 듯했다. 나는 곧 그 맑고 예쁜 눈에 포기했다. 아... 그때 도망갔어야 했는데...


H엄마가 차에 탔다. 나는 조수석에 타고 얼른 안전벨트를 맸다.

'에라, 모르겠다... 동네는 자신 있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어머나, 시동이 안 걸리네..."

난 점점 불안해졌다.

곧 H엄마는 ○○화재에 전화를 걸어 SOS를 요청했다.

그러고 나서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우리를 구조해 줄 차량이 들어왔다.

역시 배터리가 나갔다.

기사분이 배터리를 충전해 준 후에 가려고 할 때,

H엄마가 말했다.

"저기 기사님! 엑셀이랑 브레이크가 어떤 거죠? 오랜만에 해봐서 잘 모르겠어요! 오늘 운전을 해야 하는데..."

나와 기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기사는 친절히 안내를 해주었고 H엄마는 이제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기사는 내게 어떻게 엑셀과 브레이크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분과 차를 타실 거냐고 걱정을 해 주고 가버렸다.

난 결국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다. 조수석에 앉았고 H엄마는 간신히 주차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네게 말했다.

"언니, ○○언니한테 전화해 주라... 나 운전 못하겠어.... 무서워..."

"뭐! 나는 더 무서워... 당장 전화할게!!"

난 급하게 언니에게 전화를 했고 언니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우리의 구세주가 되어 주었다. 기사가 약 2시간 동안 시동을 끄지 않고 운전을 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는 영종도로 넘어갔다. 정말 아찔한 상황이었는데, 그때의 왕언니는 우리의 히어로였다.


그런 언니가 이사 가기 바로 하루 전날, 아침 일찍 언니가 갑자기 엄마들을 모두 불렀다.

엄마들은 항상 입버릇처럼 언니가 이사 가는 날 언니 집 앞에서 텐트를 치고 기다렸다가 버리는 물건이 있으면 주워오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언니는 예쁜 그릇이나 소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데, 지금보다 작은 평수로 이사를 가면 당연히 눈물을 머금고 버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아직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H엄마와 내가 제일 먼저 언니네에 도착하게 되었다. H엄마는 내게 될 수 있으면 아주 큰 가방을 챙기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얼마나 가져가려는 걸까?

우리 엄마들은 원래는 다 같이 이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T엄마, M엄마, S엄마는 영종도로 몇 년 전에 이사를 갔다. 그래서 예쁜 그릇 욕심이 있는 T엄마와 M엄마는 우리가 먼저 선점하기 전에 급하게 영종도에서 오고 있는 중이었다.


언니네 집에 들어서자마자, 집 안이 휑한 것을 느꼈다.

언니는 많은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거실에는 부엌에 숨어 있던 예쁜 그릇들이 하나씩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난 사실 그릇이나 소품 욕심은 그다지 없다. 그러나 H엄마는 광분상태였다.

"언니, 이 그릇 너무 예쁘다!! 이거 나 줘!"

"응, 가져가. 그릇 보는 눈이 있네. 이건 내가 일본에서 비싸게 주고 산 그릇인데, 장인이 만든 그릇이야. 딱 한번 썼어. 거의 새거나 다름없어. 그리고 다른 것도 있는데, 아 여기 있다. 이건 누가 가질래?"

내가 잠깐 고민을 할 새도 없이,

H엄마가 '나, 나, 나줘!'를 외쳤다.

이건 마치 스피드게임으로 그릇이 나오면 '나 줘!'를 먼저 외치는 사람이 그릇을 가져가는 게임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때론 그릇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찬장에서 무언가 빨간 게 보였는데 언니가 꺼내기도 전에 '나 줘!'를 외치는 H엄마는 순발력이 끝내주었다. 솔직히 많이 가져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미니멀리스트이기 때문에... 많이 가져가면 둘 때도 없고 잘 쓰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때 그 순간, 똥줄이 타는 건 내가 아니라 영종대교를 바람처럼 달려서 여기로 오는 두 여인이었다.

한 이 삼십 분이 지난 후, 모든 예쁘고 비싼 그릇들은 일차적으로 H엄마의 손에 들어갔다.

H엄마는 미안했는지 내게도 몇 개는 양보해 주었다. 그리고 몇 개의 예쁜 그릇은 나머지 엄마들을 위해 남겨 놓았다.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

이미 이 게임의 승자는 H엄마였다.

그녀는 좋은 지리적 위치, 빠른 순발력, 과감한 결단력,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는 감각, 뻔뻔함을 모두 갖춘 게이머였다.


그리고 급하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M엄마가 세 번째로 도착했다. 정말 빨리도 왔다.

가방을 얼른 내려놓자마자 눈치 빠른 M엄마는 쓱 한 번 그릇이 보더니 게임종료된 것을 느낀 것 같았다.

눈빛이 패전자의 그것이다.

"뭐야. 한 발 늦었네... 아~~ 멀리 살지만 않았어도 내가 선점할 수 있었는데..."

"어, 아니야. 여기 M엄마 것 남겨 놓았어. 이 그릇 예쁘지 않아? "

"응? 어 괜찮네..."

"그리고 저 그릇들은 T엄마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아? 요건 J엄마가 좋아하는 일본식 스타일 그릇들이고... 내가 다 남겨놓았어. 그리고 저기 검은색 그릇세트는 S엄마 주면 분명 좋아할 거야."

H엄마는 모두에게 그릇을 할당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T엄마였다.

T엄마도 M엄마와 같이 게임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T엄마는 이내 포기한 듯, 언니가 버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예쁜 인테리어 소품에 눈을 돌렸다.

"언니, 이거 필요해요? 이사 가면 이렇게 큰 서랍장은 필요 없지 않아요?"

"응, 그거 몇 백만 원짜리야! 왜 이래? 절대 못 줘!!"

"아.. 아쉽다... 그럼, 언니 이 조그만 서랍장은 너무 고급스러운데 이건 안 버려요?"

"응, 그거 내가 맞춤제작한 서랍장이야... 그 나무는 고급 향나무야. 그것도 안돼!!"

"언니, 그럼 이 장식장은 어때요? 좀 자리 많이 차지할 것 같은데..."

"응, 안돼! 그건 한정판으로 나온 거라 절대 안 돼! 그나저나 이 건 내가 너무 많이 산 '빈 화장품케이스'인데 덜어 쓰기 딱이야! 어때?"

아무도 가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H엄마가 "어, 이거 괜찮다. M엄마한테 필요할 것 같아." 하며 M엄마에게 넘겨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별로 가치가 없는 장식용품 같은 물건들은 다 M엄마한테 갔다.

M엄마는 마지못해 가방에 그 물건들을 넣으면서 옆에 있던 내게만 들리게 조용히 웃으면서 투덜거렸다.

"아이구... 몰래 집에 가서 버려야겠다..."


이제 언니는 계속해서 본격적으로 물건들을 정신없이 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놓기 아까워서 꼭꼭 숨겨 놓았던 물건들이 이제는 봇물 터지듯 나왔다. 잠깐 언니의 얼굴을 살펴보았는데, 모든 인간의 욕심을 내려놓은 듯이 보였다. 절대로 주지 않는 T엄마가 탐내는 물건들은 제외하고 엄마들이 달라고 하면 순순히 내어 주었다.


그때 이 물건, 저 물건 달라고 찔러대며 절대 포기를 모르는 T엄마가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예쁜 곰돌이 플라스틱 키링 6개를 달라고 했다. 언니는 그럼 공정하게 2개씩 나눠 가지라고 했다.

갑자기 나도 언니가 내놓은 너무나 귀여운 한정판 곰돌이 모양의 피겨를 보는 순간 전혀 없었던 승부욕과 물욕이 생겼다. 나는 마블영화의 팬인데 그 곰돌이들은 마블의 히어로들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앗! 너무 귀여워! 이건 꼭 갖고 싶다!' 내 안에 나도 알지도 못했던 자아가 불쑥 올라왔다.

'이건 나줘!'를 급하게 외칠려는 찰나, 게임의 여왕인 H엄마가 예쁜 키링 2개를 먼저 선점하는 바람에 정말로 갖고 싶었던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언니인 내가 H엄마에게 구걸할 순 없었다. 언니답게 양보했다.


다음에 언니는 아이방에 있는 책장을 쓸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아무도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언니, 저요! 제가 가질게요!" H엄마였다.

H엄마는 우리에게 책장을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책장은 두 개로 분리가 되었는데 하나는 큰 것, 하나는 좀 작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옮기지?"

"걱정 말아요, 언니. 제가 2동 라인에서 리어카가 있는 걸 봤어요. 그걸 이용하면 될 것 같아요."

M엄마와 나는 리어카를 찾으러 2동까지 갔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알고 보니 경비원아저씨가 말하길,

리어카가 고장 나서 지금은 쓸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쓸 수 있는 리어카를 더 찾아보는 동안, H엄마와 T엄마는 Z엄마네 있었던 끌차로 우선, 작은 책장을 옮겼다. 상당히 무거웠을 텐데... 그나마 우리 중에 힘이 센 T엄마가 거의 책장을 혼자 들다시피 해서 H엄마의 집 거실에 설치를 끝내주었다.


우리의 고비는 남은 큰 책장을 옮기는 것이었다. 결국 리어카는 찾지 못하고 우리 넷이 큰 책장을 네 군데를 각각 들어 6동에서 2동으로 옮겼다. 이 나이에 이렇게 책장을 옮긴 것이 처음이라 새롭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그. 러. 나...

그 큰 책장은 너무 커서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지 못했다.

착한 엄마들이 H엄마의 집까지 계단으로 들어다가 준다고 했지만, H엄마는 그건 아니라며 끝내 거절했다.

결국 2동에 책장은 덩그러니 버려졌다. H엄마는 너무 아쉬워했다.

그리고 우리가 차를 마시고 다시 왔을 때 이미 책장은 누군가가 가져가고 없었다...


H엄마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죽 쒀서 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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