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묵시록
보통 러시아라고 하면 겨울과 눈, 혹한의 날씨를 연상한다.
* ~스탄 쪽은 아무래도 그런 이미지가 덜하므로 러시아 위주로 쓰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긴 겨울을 살아내기 위해 여름에 부지런히 저장식품을 만들어둔다’는 설명만 보면 겨우내 집 안에서 오들오들 떨며 절인 오이나 생선을 소비하면서 연명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토가 워낙 큰 곳이다 보니, 땅 대부분이 세계지도에서 하얗게 표시되는 그린란드 같은 곳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얼어서 부서진 빨래를 들고 ‘어쩔 수 없죠.’라며 태연한 시베리아 저편의 삶과 흑해나 카스피해 부근의 따땃한 삶은 확실히 다르다.
진정한 빙하기에 근접한 기온의 러시아 시골같은 다양한 지역에서 거주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게시글 내용을 주요 도시로 한정해야 하는 것은 아쉽지만, 요지는 마냥 겨울나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방문했던 러시아 이곳저곳보다는 오히려 위도가 더 낮은 카자흐스탄이 더 추웠다.
모스크바 추위 관련 에피소드도 풍부하지만, 시린 추위가 아닌 피부가 찢어질 듯이 아픈 추위는 그곳에서 비로소 접할 수 있었다.
난방이 고장난 어느 날은 실내에 둔 핸드크림이 꽁 얼어버렸다.
물론 그것은 장소가 아스타나이기 때문이며, 카자흐스탄도 워낙 땅이 큰 나라라 지역 by 지역이다.
* 당시 주요 이동수단이었던 지나가던 자가용을 얻어 타면 “예전에는 -50도까지 내려가곤 했었어!”라는 현지인의 추위부심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추위 얘기를 좀 더 하자면, 북극해 부근 무르만스크 지역은 발가락이 아프게 얼어붙는 수준을 넘어 발꿈치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처음으로 겪은 곳이다.
* 그날은 양말 네 겹에 양털부츠까지 신고 있었다.
동행했던 현지인에 따르면, 이런 추위를 고려해서 시내 모든 집으로부터 버스 정류장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7분을 넘지 않도록 도시가 설계돼 있다.
다시 러시아는 완전한 겨울 나라가 아니라는 주제로 돌아와서, 그곳에도 분명 사계절은 있다.
널리 개최되는 봄축제가 그 증거 중 하나일 것이다.
땅이 워낙 넓다보니, 아래는 모스크바로 한정된 내용이다.
기후 변화가 크게 오고 있지만 한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시민들에게도 일단 3월부터는 봄, 6월부터는 여름, 9월부터는 가을이라는 인식이 있다.
* 4월 초인 얼마전, 벚꽃 날리는 영상을 올리자 모스크바 친구는 같은 날의 눈보라 영상으로 화답했다. 하긴, 올해는 한반도에서도 심심찮게 눈 예보가 있었던 시기인 것 같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계절은 있다.
<봄>
눈이 그치기 시작하고 편마암 모양으로 쌓였던 먼지 섞인 눈이 더럽게 녹아내리면 당장 인부들이 붉은 광장을 비롯한 이곳저곳을 꽃으로 뒤덮기 시작한다.
민들레 씨앗 같은 털들이 눈처럼 날리다 도로변에 쌓이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딸기, 블루베리를 비롯한 온갖 열매들을 파는 천막들도 여기저기 펼쳐지면서 도시에 색이 더 입혀진다.
딱정벌레들의 폭격도 시작된다.
어둑해지면 어느샌가 방으로 들어와서 전등에 전력으로 몸통박치기를 해대서 꽤나 귀찮다.
모기가 없어서 모기장을 설치할 생각을 안 했는데 쟤네 때문에 인터넷으로 망을 주문해서 테이프로 창틀에 붙이는 셀프 공사를 했다.
<여름>
식당에서 저마다 바쁘게 뚝딱뚝딱 테라스를 짓기 시작하면 여름이 차질 없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며, 테라스석은 제일 먼저 만석이 된다.
쭉쭉 가속을 받아 길어지는 해를 따라 시민들은 열심히 시내 공원 및 교외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샤슬릭을 굽고 휴가를 떠나고 양껏 햇빛을 즐기기 시작한다.
오후 11시쯤 겨우 어두워져서 오전 2시에 하늘 저쪽에서 빛이 올라오는 통에 헷갈린 새들이 잠도 못 자고 짹짹댄다.
35도 수준의 폭염이 한 번씩 기록되기도 한다.
2021년 코로나 창궐 당시, 스푸트니크 백신을 맞지 않아 실내 입장이 불가능했던 친구와 테라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줄줄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과 속도전을 펼쳤다.
더워죽겠는데 앞에 앉은 아저씨 암내 때문에 기절할 것 같다는 불평 메시지가 오기도 한다.
그래도 비교적 최근까지는 에어컨이 필수 옵션은 아니었고, 선풍기 붙잡고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8월 중순을 넘어가면 슬슬 외투를 입기 시작한다.
<가을>
“золотая осень(황금빛 가을)”이라는 표현과 이것이 무색하지 않은 풍경들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온다.
여러 카페에서 사과 케이크나 호박 디저트를 판매하기 시작하면 가을이라는 것이다.
라떼나 카푸치노가 더 맛있어지기 시작한다.
식당 테라스 해체작업도 곧 시작된다.
버섯을 따러 숲으로 탐험을 나가는 시기도 이쯤이다.
나무나 숲이 많은 도시라, 군데군데 기계로 낙엽을 불어 날려 치우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다.
<겨울>
그리고 다시 겨울이 되고, 오후 4시 반에 이미 깜깜할 정도로 밤이 길어짐에 따라 도시의 반짝임도 눈에 띄기 시작한다. 물론 출근 시간도 바깥이 캄캄하다.
한국에 비해 새해 준비를 서두르는 편이며, 가장 좋은 발레 프로그램도 겨울에 볼 수 있다.
몇몇 공원과 붉은 광장에는 물을 얼려 스케이트 트랙을 만들고, 크리스마스 마켓이 세워진다.
상점들은 경쟁하듯 트리를 꾸미는데, 특히 굼(ГУМ)으로 들어가면 그것을 모아서 볼 수 있다.
이 백화점에서는 계절별로 컨셉에 충실하게 내부를 꾸며놓는다.
컨셉이 얼마나 다양한가 하면 우주, 호두까기 인형, 수박, 호박, 귤, 아이스크림, 축구, ...
당장 생각나는대로만 대충 써놔도 1년이 상당히 알록달록하다.
여행하기에는 어느 계절이 좋냐는 질문을 한번씩 받는데, 이런 이유로 딱 정해서 답을 해 줄 수가 없다.
사실 당장 계절보다는 종전 시기를 더 우선으로 봐야 할 것 같긴 하다.
이상 한국의 흐드러지는 봄을 보내다보니 슬슬 낮이 길어지며 활기를 찾기 시작하는 도시가 생각나서 써본 글이다.
이리저리 치고박고 얻어맞느라 정신없는 지구인(ㅋㅋ)들이 계절이 변하는 모습을 즐기기만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