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묵시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외 -스탄 지역에서 널리 즐기는 간식을 소개하고 싶었다.
제목 그대로 뽀얗고, 하얗고, 동글동글하다.
설명만 보면 언뜻 이 슈가볼 쿠키(sugar ball cookies)가 연상될 수도 있겠으나, 전혀 아니다.
이 녀석들이 그 간식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부르는데 널리 쿠르트(курт)라고 한다.
꾸르뜨, 쿠르뜨, 꾸르트, 어떻게 발음을 해도 나는 저 하얀 동그라미들을 바로 떠올릴 것이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쿠르트.
고수에서 농후한 퐁퐁맛밖에 못 느끼던 시절에도 쿠르트는 고수 너머 이세계(異世界)레벨로 분류했었다.
짜조쌈과 타코에 자발적으로 고수를 잔뜩 뜯어넣어 그 비누맛을 즐길 줄 아는 자로 성장한 지금까지도, 쿠르트를 찾을 일은 맹세코 단 한번도 없었다.
언제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프렌치토스트를 굽는 생활과 유목민들의 삶은 거의 반대편에 위치할 것이다.
그들은 유제품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수세기 전에 쿠르트를 고안해 냈다.
수즈마(сузьма)라는 일종의 유가공품에 소금을 첨가해 가며 뭉치고 말려서 만든다.
* 두피를 가벼이 뚫고 해골까지 때리는 듯한 카자흐스탄의 햇빛을 맞으며, 과연 건조에는 별 문제가 없었겠다고 생각했다.
쿠르트 크기는 100원짜리 동전부터 8개월 아기 주먹까지 다양하며 훈제 버전도 있다.
공산품이 아닌 홈메이드를 스뎅 오봉에 늘어놓고 시장에서, 길바닥에서 팔기도 한다.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입안에 넣는 순간 ‘우유를 흠뻑 쏟은 행주가 습한 부엌 구석에서 약 2주 뒤에 발견되면 내뿜을 것 같은 향’이 목젖과 콧구멍을 후려치고, 즉시 온 입안의 수분이 빨려나가는 굉장한 삼투압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 누군가는 맛있게 먹는 간식을 이런 식으로 묘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쿠르트를 모르는 이들에게 달리 설명할 방법을 아직 못 찾았다. 쿠르트는 쿠르트이기 때문이다.
쫄깃하게 생긴 주제에 마구 바스러지는 성질을 갖고 있어 더욱 곤란하다.
아직 알약을 못 삼킬 때 눈 꼭 감고 오만상을 쓰며 가루약을 넘기던 날이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꼴깍 물을 삼키며 끝났다, 안심하려던 찰나 잇몸과 입술 안쪽 사이에 잔류하던 가루를 느낀 적이 있다면 왜 곤란한 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소중한 두 벗이 러시아로 놀러 왔을 때 작게 포장된 오리지널 쿠르트, 훈제 쿠르트를 사다 나눠주며 회사 동료들과 나눠먹으라고 덕담한 적이 있다.
그들은 여행을 마친 뒤 그것들을 싣고 한국에 돌아갔고, 예상대로 며칠 후 뜨뜻한 항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쿠르트와 비교할 만한 '외국인에게 낯선' 한국 음식이 뭐가 있을까 곰곰 생각하다가 청국장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청국장은 냄새가 그 얌전하고 구수한 맛을 덮을 뿐이다.
이 분야에서 자주 이름 올리던 흑산도 홍어는 안 먹어봐서 데이터가 없으므로 비교를 못하겠다.
아무튼 -스탄에서는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하나씩 꺼내서 마시멜로 먹듯 맛있게 먹는 간식이다.
국 요리에도 사용하지만 새알 옹심이 같은 느낌은 절대 아니다.
쿠르트는 쿠르트다.
첫 쿠르트 경험은 얄궂게도 한국에서였다.
한국에 막 도착한 교환학생이나 문화교류 손님을 돕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서인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오신 분이 배정되었다.
숙소까지 무사히 안내하고 이것저것 알려드린 뒤 다음에 봐요, 안녕- 하려는데 그가 붙잡았다.
그는 가방 깊은 곳에 소중히 들어있던 비니루 봉다리를 꺼냈다.
귀엽 뽀송하게 생기고 아기 주먹만 한 하얀 동그라미들이 안에서 한번 데굴 굴렀다.
그는 봉다리를 뜯고 수줍게 하나를 내밀었다.
- 요거트와 비슷한 우리 간식, 쿠르트예요. 드셔보셨나요?
- 오 아뇨,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이역만리 멀리서 싸 온 귀한 간식을 나눠주시는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하얀 덩어리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고, 그 뒤는 저 위에 서술한 대로다.
입 안쪽 껍질 한 꺼풀을 벗겨내 저 하얀 친구와 혓바닥까지 함께 꼭꼭 싸서 즉시 내 바디에 더 이상 닿지 않도록 깨끗이 분리시켜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귀하게 생각하는 것을 준 사람 앞에서 뱉을 수는 없으므로 그대로 삼켜버렸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동그란 것을 느끼며, 갑자기 쳐들어온 시허연 빌런에 놀랄 위장을 살짝 걱정했다.
'요거트'라는 단어에 거대한 함정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몰랐다.
다양한 문화 체험을 아직 덜 했던 한국인의 머릿속에 있는 '요거트'란 프레시하고 상큼하고 때로는 달달한 것이었고, '간식'이라는 것도 그저 달콤하거나 고소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치부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를 탓할 수 없다.
'요거트 간식'이라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쿠르트가 무지 궁금하고 맛보고 싶다면 -스탄 어딘가의 재래시장을 찾아가 볼 것을 추천한다.
그곳에서는 홈메이드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시장까지 찾아갈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가까운 마트에서도 만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