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한국어 함부로 쓰지 마시오.
뜨거운 공기를 지나 알마티 공항 건물로 들어가는데 번쩍번쩍한 것이 아무래도 손을 좀 본 것 같았다.
수하물 기다리는 곳에서 옆에 있던 가족이 촐싹대는 어린이(이름이 '이고르'였다) 하나를 진정시키는 소리를 들으며 택시앱 얀덱스고에 숙소 주소를 찍었다.
랜딩이 오후 2시쯤이었는데 비행기 주차, 공항버스 이동, 입국심사, 수하물 수령까지 전부 마치고 택시를 잡으니 오후 3시가 되었다.
입국 심사를 포함한 모든 과정이 내 기억에 비해 너무나 순조롭다.
알마티 공항 무료 와이파이는 유심없이 여권 사진만 찍어서 인증하면 굉장히 빠르게 작동한다.
공항 출구로 나가서 횡단보도 한 칸 건너면 타는 곳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했던 뜨거운 공기가 다시 온 안면에 철썩 달라붙었다.
흡사 에어프라이어다.
다행히 지체없이 도착한 캠리 기사님은 트렁크에 캐리어 4개를 능숙하게 돌려끼워넣으셨다.
- 너무 덥네요. 알마티 여름은 원래 이런가요?
- 40도까지 오르기도 하죠. 이걸 봐요(디스플레이에는 43도가 나타나있었다.)
- ...혹시 우리가 가장 더운 순간에 온 겁니까.
- 그렇죠.
알마티에는 도시와 같이 나이를 먹어온 나무가 많다고 했다.
과연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길부터 녹색이었다.
상추밭을 지나는 일개미가 된 기분으로 녹음을 감상했다.
'알마티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힌 굴다리도 지났다.
- 한국인들이죠? 카자흐스탄은 처음이신가? 러시아어는 어떻게 할 줄 아시는거요?
- 카자흐스탄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얼마간 있었거든요. 러시아어는 여차저차 살다보니...
- 오 나도 한국에서 한 3년 일한 적 있어요.
- 어쩐지 한국인을 구분해내시더라니.
늘 주변에 당부하고 다니는 바인데, 장소가 해외거나 상대가 외국인처럼 보이더라도 한국어로 막 뱉지 말 것.
기사님은 '고기'같은 간단한 한국어 단어를 더듬더듬 섞어가며 대화하기 시작하셨다.
한국에서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하셨다.
인천공항이 세계 1위 공항으로 처음 선정되었던 당시 한국에서 체류했었다고 하니 상당히 오래 전이다.
못된 사업주한테 걸렸는지 월 50만원 받고 일한 적도 있다는데 일단 다른 한국인들은 친절했다고 하셨다.
* 미등록 외국인이라 대응을 못했나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 지금 한국인들 기본급 더 높아졌지 않나? 월 3,000달러 정도 돼요?
- 아유 무슨 말도 안되는 말씀을. 택도 없으니 알마티 식당 추천이나 좀 해주세요. 라그만 너무 그리웠거든요. 세련된 식당이 아니라도 좋아요.
- 여기저기 많은데 나밧(NAVAT)이라는 곳에 가보슈.
나밧이라는 식당에 가본 적은 없지만 무난한 관광객 맞춤 식당인가 싶었다.
원하던 골목 구석 분위기는 확실히 아닌 것 같다.
이윽고 택시는 숙소 건물 앞에 섰다.
기사님은 짐을 내려주시며 즐거운 여행을 기원해주셨다.
디귿(ㄷ) 모양 주거단지 아르바트(ЖК Арбат)
다니다보니 숙소 위치가 정말 괜찮았다.
캐리어를 돌돌 끌며 폭력적인 햇빛과 기온을 비집고 나아갔다.
자석키 없이 어떻게 입구로 들어갈지 본격적으로 고민하려고 하는데, 앞서 가던 여성이 누군가에게 문 좀 열어달라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단 그에게 바싹 붙었다.
이윽고 핑크 롤러블레이드를 탄 곱슬머리 소녀가 안쪽에서 문열림 버튼을 눌러주었다.
7박이라 공간 크고 분리 잘 되는 곳으로 잡았다.
숙소는 나중에 따로 링크 올려서 쓸 예정
전편 일부의 비하인드 같은 이야기이다.
현금 뽑고 유심 사러 갈 때였다.
숙소에 짐가방을 들인 후 청년들끼리 튀어나왔다.
미리 지도에 표시해둔 ATM과 빌라인(Beeline) 지점을 차례로 찾아가 재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올 생각이었다.
사진의 스낵바를 마주보고 오른쪽에 있는 문으로 쭉 들어가면 카스피 뱅크, 할릭 뱅크 ATM이 있다.
내부에 널린 폰 매장에서 뭐라뭐라 하는 것은 단순 호객이다.
시크하게 병정걸음 걸으면 된다.
금방 현금 뽑고 아르바트에 있는 빌라인 지점으로 갔다.
그렇게도 많이 언급되던 알마티의 아르바트는 내가 알던 아르바트와 당연히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에 어떤 직원이 보여줬던 카자흐스탄 아이돌 뮤직비디오에 여기가 나왔던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NINETY ONE
아이돌 구분을 잘 못하기도 하고 언뜻 보고 빅뱅인 줄 알았다.
이런 영상에 야구 빠따는 늘 애용되는 아이템인 것 같다.
당근색 머리하신 분은 꿈에도 한번 나오셨음.
아무튼 긴 기다림을 거쳐 빌라인 유심 구매도 마쳤다.
생각했던 가격은 아니었지만 담당 직원은 최선을 다해줬다.
그는 카자흐스탄 번호에 여권정보를 등록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 카자흐스탄 말도 알아요?
- 조금요. 악샤 바르마?(Ақша барма?)*
- (옆에 있던 직원까지 빵 터지심) 누가 그런 말을 했나보넼ㅋㅋㅋㅋ
- 또 있어요. 우니타즈가 카가즈드 타스타우가 볼마이드(Унитазга кагазды тастауға болмайды).**
- 앜ㅋㅋㅋㅋㅋㅋ
[카작어 뜻] * 돈 있냐? / ** 변기에 휴지를 버리지 마시오.
신호가 연결되자마자 숙소팀이 날린 부재중 통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벌써 오후 5시 반이었다.
이른 저녁 식사 후 휴식을 계획했었는데 생각보다 더 확실하게 망했다.
다시 온풍 열풍에 깎여나가며 열심히 복귀했다.
그렇게 바로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면 좀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이번에는 절대 잠기지 않으려는 숙소 현관 전자키패드와 치열히 싸웠다.
처음 보는 시스템이라 결국 숙소 주인에게 연락해서 해결했음.
결론적으로 철저히 힘에 지배당하는 문고리였기에 완력으로 해냈다.
드디어 택시를 타러 나갔다.
차들이 뜨거운 바람을 잔뜩 끼얹으며 지나다녔다.
풍화 작용만큼은 제대로 체험하고 있다.
저녁 식사는 카자흐스탄에 오면 반드시 먹게되는 양갈비 샤슬릭으로 정해뒀다.
그래서 그 식당 이름은 ‘베네치아’(?????)
* 그 베네치아 말고 다른 베네치아가 또 있나 했는데 정말로 간판에 킹받는 곤돌라 그림이 있었다. 식당 옆에 졸졸 흐르는 개울같은 게 있긴 했다.
* 평가: 시차부적응 상태에서 활발한 신체 및 정신 활동을 거친 덕분에 가수면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먹어도 맛이 훌륭할 정도다. 양갈비를 뜯으면서 양갈비를 추가했다. 최소 1인 1꼬치 권장하며, 굽는 데 시간이 꽤 걸리므로 여유를 가지고 식사할 것.
양갈비는 메뉴판에 안뜨리꼿(антрекот)이라고 적혀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안뜨리꽃'같은 드립을 치던 시절도 있었다.
저녁이 늦어지자 점점 식당이 와글와글해졌다.
군청색 양복, 파티 드레스, 주고받는 왕큰 꽃다발들을 보니 알마티 시민들의 알려진 저녁 모임장소인가보다.
오랜만에 식후 밀크티 하려고 했는데 다들 잠이 더 필요해보였다.
다만 숙소가 조식 없는 에어비앤비이므로 최소 마트는 들러야했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택시 기사님은 중국인과 함께 폰 판매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북아시아인 손님들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중국어를 써보려 하셨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한국인이었다.
끝까지 친절했던 그는 여행에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기사님이 직접 보여주셨던 진입로로 걸어 마트로 갔다.
아르바트에 있는 매그넘(Magnum) 마트는 매장 관리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바닥 타일이 깨져나와있거나 들썩들썩 춤을 추고 있었다.
채소나 과일도 기꺼이 살 만한 품질이 아니었음.
러시아에서 자주 이용하던 브꾸스빌(вкусвилл)이 숙소 근처에 있어서 들렀다.
나름 국경을 건너와서 그런지 구매욕 다 꺾는 가격이 되어있었다.
망고 한 알이 3,000텡게, 채소도 숙소 아래 마트보다 2배 이상 비쌌는데 품질이 압도적으로 좋아보이지도 않았다.
어쩐지 손님이 없었다.
다음 날 예정된 장거리 여행에서 씹을 견과류나 고구마칩 정도만 사서 나왔다.
가깝고 크고 괜찮은 마트는 훗날 발견하게 된다.
숙소 아래에는 24시간 마트가 있다.
그 안에 과일/야채가게가 입점해있고 현금/계좌이체만 가능하다.
앞의 두 가게보다 상태가 훨씬 괜찮아서 살구, 털 없는 복숭아 정도 구매했다.
살 만큼 봉다리에 담으면 무게 달아서 계산해줌.
이 마트는 단지 안쪽과 바깥을 바로 연결하는 웜홀로도 이용할 수 있다.
이후 여행 내내 건물 입구 쪽으로 돌아가는 대신 지름길로 활용했다.
다음 날 일정은 아씨 고원(Плато Асы)이다.
가이드와 아침 9시에 숙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번 여행의 중심 콘셉트는 '중앙아시아의 대자연 감상'이기 때문에 그에 충실한 하루를 만들 예정이었다.
반드시 그런 날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