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했다. 다르다.
정말 오랜만에 창 밖으로 톈산*을 보면서 착륙했다.
* 천산이라고도 하는 것 같은데 표기는 Тянь-Шань이다. 읽으면 쨘샨;
사실 비행기의 가운데 자리에서도 정가운데에 구겨져있었다.
때문에 '보면서 착륙했다'라는 건 일부만 맞다.
기장이 기체를 왼편으로 한껏 눕힐 때에야 산귀퉁이 정도 보였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가는 항공편 쨘샨뷰ㅋㅋ가 멋졌던 기억이 있다.
룸메이트를 포함한 동행자 모두 이쪽 문화권을 접한 적이 없다.
나로서는 늘 근무지였던 카자흐스탄에 처음으로 여행자로서 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낯선 감정이라도 다가오면 그게 뭐든 기꺼이 맞이할 생각이었다.
부드러운 착륙 직후 승객들의 박수갈채소리가 들리면,
그리고 한국보다 시원한 공기를 맞으면
그때 그런 기분이 찾아올까.
그러나,
무사히 착륙했음에도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옆자리에 있던 룸메와 시선을 교환했다.
농도 짙은 텍사스 미국물을 마시고 왔던 그는 기대에 차있었다.
여행 전 그에게 언급했던 착륙 박수를 실제로 듣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러시아 및 카자흐스탄 등지를 오가는 비행기에서는 착륙할 때마다 박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지역에만 있는 고유 풍습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박수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 부드럽게 착륙한 조종사에게 보내는 존중,
- 무사히 땅에 닿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같다.
약간의 덜컹거림도 없이 공중에서 땅으로 연결되며 착륙한 어느 날에는 박수에 그치지 않고 "브라보!"까지 나왔다.
이내 비행기가 도르르르 굴러 속도를 줄여갔다.
하지만 박수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복귀편도 마찬가지였다.
택시 후 주차까지 해야 비로소 비행이 끝나므로 착륙 직후 박수는 이르다느니, 당연히 비행과 착륙을 안전하게 해내는 조종사에게 박수는 무례라느니 의견이 분분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리워하고 있었나 보다.
훗날 이 당황스러움을 러시아 친구에게 전했다.
그도 최근에는 박수 소리를 잘 못 들었다며, 특유의 감성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최근 여행 차 한국 오는 길에 난기류로 고생한 터라 열심히 손뼉 쳤는데 혼자였다고.
구소련 무슨 일이야.
첫 문화체험을 놓쳐 아쉬워하는 룸메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행기에 설치된 계단을 내려가서 공항 건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줄을 서서 천천히 입구로 이동했다.
창문 밖을 보자 톈산이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차르륵 펼쳐져있다.
탁 으깨지는 청포도 과즙마냥 상쾌한 산공기가 연상되는 풍경이었다.
이윽고 비행기 밖으로 두 걸음 반 정도 내디뎠을까,
한 김 식은 찌개처럼 뜨끈한 뭔가가 온몸을 빈틈없이 꽉 압박하며 껴안았다.
시선 끝에는 분명 만년설이 쌓인 톈산이 보였는데.
비행기 열기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버스까지 걷는 내내 그 공기가 붙어서 따라왔기 때문이다.
6월의 대만, 7월의 두바이를 기억에서 꺼내 열심히 비교했다.
습도 측면에서 두바이 쪽이 좀 더 가깝다.
예전에 살던 수도 아스타나는 확실히 비교 대상에 적합하지 않다.
왜 내가 기억하는 카자흐스탄의 여름과 이렇게도 다른 것인가.
지구온난화가 이렇게까지 급발진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아스타나와 알마티의 차이인 듯하다.
러시아 검색 엔진 얀덱스(Яндекс)의 AI 정령 알리사(Алиса)에게 물어봤다.
아스타나의 여름 기후
* 6월에 더위가 시작되어 기온이 최소 19°C, 최대 30°C까지 오릅니다.
* 7월에는 최고 기온을 기록합니다. 보통 낮 30°C, 밤 22°C 정도입니다.
* 8월 낮과 밤 평균 기온은 각각 21°C, 17°C입니다.
알마티의 여름 기후
* 5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더위가 지속됩니다. 동 기간 평균 최고 기온은 23°C 이상입니다.
* 7월 평균 기온은 31°C인데 밤에는 15°C까지 떨어지고, 낮에는 39°C까지 상승할 수 있습니다.
알리사가 틀렸다.
잠시 후 공항을 출발한 택시 안 디스플레이에는 43도가 찍혀있었다.
룸메가 조용히 한마디 던졌다.
"...여기 텍사스인데...?"
깨끗이 단장한 공항, 빠른 입국심사, 입국 서류 생략, 빠른 공항 와이파이까지.
뭔가 심상치 않다.
다르다.
이미 전에 알던 카자흐스탄과의 간극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든 동행자 세 명의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무게감에 묘한 낯섦이 살포시 얹혔다.
아, 할 일 천지삐까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