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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과 저승 사이의 아씨 고원(Плато Асы)

6월은 유목민 시즌

by 해일

화덕빵과 쌈싸를 맛있게 먹고 아씨고원 진입 전 마지막 쉼터에서 계곡물을 보며 감탄하고 있던 과거.




이날 투어를 예약하기 전에 가이드가 보낸 차량 사진을 보고 세 번쯤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이 있다.


- 보바씨, 거긴 엄청난 오프로드를 지나야 한대요. 차고가 낮아서 차가 망가질까 봐 걱정이 많이 되는데 정말 괜찮아요?


아씨고원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던 보바씨.

이번 의뢰를 받고 지인들이 찍은 비디오와 유튜브를 보면서 아씨고원으로 통하는 길을 세 번 넘게 예습했다고 하셨다.


그러니 괜찮다고 하셨다.

* 결코 괜찮지 않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우리는 화덕빵 귀퉁이를 조금씩 뜯어먹으며 비짓센터를 벗어났다.

오프로드를 어떻게 지나갈지 앞서 상상 가능한 영역도 아니었으므로 미리 심각해질 수는 없었다.


화덕빵 꼬집


마침내 깨끗이 닦여있던 아스팔트 길바닥에 돌멩이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갈수록 그 수가 늘었고 크기도 점점 커지더니 어느덧 작은 바위가 되어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침에 봤던 낮은 차량 높이를 떠올리며 ‘정말 괜찮으니 괜찮다고 하셨겠지?’라는 생각을 마치려던 순간이었다.

* 다시 한 번, 결코 괜찮지 않았다.


- ㅈ잠깐만요, 보바 선생님, 정말 괜ㅊ…..ㅋㅍ뛇!!!


오프로드가 무슨 뜻인지는 잘 안다.

자동차 쇼바와 싱크로율을 최대치로 달성하며 이렇게 얻어맞는 느낌도 잘 안다.

두개골 안에서 뇌가 흔들리는 것도, 이리저리 나동그라지며 사방으로 나풀거리는 팔다리에 셀프로 얻어맞는 그림도 예상범위 내에는 있었다.

타가다 디스코라든가 두바이 사막투어를 통해 이런 감각은 익혔던 터다.



그래서 오프로드 드라이브가 물리적으로 주는 충격 자체는 미미했다.

그런데 차량 바닥이 드드드득 긁혀나가는 소리가 그렇게 사무치게 가슴 아플 줄이야.

보바씨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이리저리 차를 돌려 큰 돌땡이를 피하면서 페달을 밟으셨다.



그리고 곧 다른 문제에 직면했다.

바위를 피하느라 차 왼쪽 바퀴가 낭떠러지 끄트머리에 걸친 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오프로드에 가드레일이 있을 리 만무하다.

급류가 철철대는 계곡으로 데굴 굴러떨어지는 상황이 머지않았다.



그 상태에서 바위 하나를 넘어가지 못해 윙-하고 바퀴가 헛돌더니 뒤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 번 정도 반복하자 그야말로 저승(또는 요단강) 익스프레스였다.

제일 험한 구간인듯하여 결국 4명이 내려서 잠시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200kg 이상 줄어들면 이 뭐시기 익스프레스도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IMG_8031.jpg?type=w773 사진에서는 길이 평탄해 보여서 억울함


올라가다 뒤돌아서 이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복귀할 때 이 풍경이 보이면 또 내릴 생각이었다.


IMG_8038.jpg?type=w773

여행 내내 여기저기서 보이던 파란 꽃.

제철인가 보다.




여차저차 문제 구간을 탈출하자 마침 내려오는 지프차 한 대가 보였다.

보바씨는 지프를 붙잡았다.


- 브로, 안녕하시오. 이 차로 더 갈 수 있을 것 같나요?

- ...(절레절레)...4륜입니까?

- 네, 4륜 구동이오.

- ...(절레절레)


기사는 4륜 구동이라는 말에 차량을 훑어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갈 길을 떠났다.


그냥 돌아가는 게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또 다른 차가 내려왔다.

낡고 낮은 빨간색 소형차였다.

잔뜩 신난 어린이 둘을 포함한 4인 가족이 안에서 꿀렁대고 있었다.

그들은 왠지 우리 차로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잔뜩 심어주고 해맑게 지나갔다.


가능과 불가능, 어디에 맞춰야 할지 애매했다.




이윽고 일이 터졌다.


[ㅋ쿠드ㅡㅡ르ㅡ드드듥긒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소리와 진동이었다.

설마 하고 사이드미러를 보자 저 뒤에서 외롭게 뒹굴고 있는 사이드스커트가 보였다.


- 어어어 잠깐 멈춰요! 뿌사지뿟다!!


차에서 내려 확인하자 앞쪽은 완벽히 뜯겨져나갔고 뒤쪽 사이드스커트도 덜렁덜렁했다.

천만다행으로 교체 비용이 비싼 문은 손상되지 않았다.

보바씨는 뒤쪽도 마저 뾱 뜯어내더니 트렁크에 실으셨다.

모두가 숙연해졌다.

남의 차를 이렇게까지 걱정해 본 적이 있었던가.


보바씨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괜찮다며 덤덤하게 차를 계속 몰았다.

당연히 그냥 긁힌 정도가 아니므로 어딘가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싫은 소리 없이 어떻게든 의뢰한 목적지까지 데려가려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온갖 색깔의 위기감으로 얼룩덜룩한데 그 책임감에 대한 존경심까지 스멀스멀 새어 나와 섞이는 통에 감정은 정말 알 수 없는 혼합물이 되어버렸다.

* 특히 중앙아시아 쪽 남성들이 차에 대해 예민한 모습을 많이 봤다. 택시(자가용) 문을 조금만 세게 닫아도 불만 가득 뾰로통쟁이들이 됨.




갑자기 도로 위로 돌출되어 나온 크고 아름다운 절벽이 보였다.

IMG_8111.jpg?type=w773 돌아오는 길에 찍은 것


옆에 꼬물꼬물 기어가는 차를 보면 얼마나 큰지 대충 가늠된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정말 압도적인 모습이었는데 사진에서 보니 그냥 돌땡이같기도 하다.


- 저 절벽이 나온 걸 보니 거의 다 온 듯하군요

- 오?

- 영상에서 그러더라구요.


과연 절벽을 지나고 머지않아서 텔레토비 동산이 하나둘씩 쑥쑥 올라와 시야에 잡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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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정말로 사고가 나서 이승도 저승도 아닌 이세계로 온 게 아닌가 싶었다.

돌밭이 갑자기 사라진 데다 풍경도 많이 달라져있다.


아직은 낮은 지대였고, 더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또 펼쳐져 있었다.


IMG_0806.JPG?type=w773 캠핑하는 사람들. 오른쪽에 작은 화장실 텐트도 있다.


위 사진 왼편 뒤 저쪽 동그란 곳까지 올라갈 예정이다.

올라가는 길은 초원 가운데로 난 흙길이라 어디로든 떨어질 일은 없어 보였다.


발랄말

발랄하게 퐁당퐁당 뛰어다니는 말들

뜬금없이 노래방 화면 배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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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진 오른쪽 언덕 위의 말이 시선 강탈한다.


아씨고원은 유목 시즌이라 말, 소, 양을 거느린 집단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왕만두처럼 생긴 집들도 곳곳에 놓여있다.

저런 이동식 가옥을 몽골에서는 '게르'라고 하고 여기서는 '유르타(юрта)'라고 부른다.


니땅내땅 안 긋고 계절 내내 이쪽 언덕 사이사이로 다닌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일상을 가로질러 지나갈 뿐이었다.




아까의 그 바윗길에 비하면 '비교적' 스무스하게 정상에 도달했다.


마침내 내려다본 광활한 지구 한 조각의 모습을 줄줄이 묘사해 봤자 제대로 된 설명은 불가능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진이든 영상이든 참 구리게 나온다는 점이다.


아씨 고원


하늘도 크고 지구도 크다.

텐트까지 대여해서 1박 하는 투어 프로그램들도 있던데 날씨가 맑았더라면 별을 보기 위해 신청할 만할 것 같다.

* 생애 최고의 별 파티는 꿈틀대는 오로라가 드리워진 12월의 무르만스크 근교 밤하늘이었다.


양양양양양양양양양양양양양양양양양


양 떼가 실로 드글드글하다.

때로는 가녀린 울음소리가, 때로는 걸걸한 외침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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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전혀 안 친해 보이는 꽃들이 조화롭게 늘어져있고 말똥도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체감기온은 청바지, 반팔 티, 긴팔 셔츠 입고 있으면 으슬으슬한 정도.

6월 말 기준 얇은 돕바 정도는 챙겨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비도 살짝 왔는데 빗방울 굵기가 일정하지 않아 하늘이 퉤퉤 뱉는 침을 온 얼굴로 맞는 것 같았다.

돗자리 깔고 한가로이 피크닉 할 날씨는 전혀 아니었다.

희망 회로도 잠시 돌려봤었지만 산 날씨는 워낙 변덕이 심하니 어쩔 수 없다.


IMG_0919.JPG?type=w773 말에 오르는 사람이 같이 찍혔다.


해발 2,200~2,600m였던가.

기압차로 고구마칩이 빵빵해졌다.

간식 먹고 싶었는데 뜯으면 안 될 것처럼 생겼다.


밖에서 말이랑 소랑 양이랑 멍 때리면서 더 앉아있고 싶었는데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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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9510.JPG 내려가는 길에 이것저것


길게 적지는 않겠지만 내려갈 때도 같은 길이었다.

대충 올라올 때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는 뜻이다.

그 어느 락페와도 견줄 수 있을 만큼 강한 헤드뱅잉을 했다.

아니, 차 안이 그냥 슬램존이었다.

* 중간에 어느 정도 걸어갈 테니 제발 내려달라고 간청했다. 보바씨는 고객을 걸어가게 할 수 없어서 그랬는지 극구 말리며 저승 드라이브를 이어나가셨다.


우리는 끝내 생존했고내려왔고, 다시 비짓센터에 들러 꼭두각시처럼 흔들리던 팔다리를 진정시켰다.

식당에서는 한참 전통 가락에 맞춰 저세상 흥으로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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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위 사진에 올린 초원 저쪽 소를 한참 아래인 이곳에서 다시 만난 줄 알고 엇?!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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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하게 비밀기지 같은 포스가 있어서 올라올 때부터 신경 쓰였던 폐허들.

그리고 다 내려오자 기가 막히게 날씨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 ...아씨고원은 이제 끝이에요.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다시는 안 옵니다.

- 올바른 결정이에요.


그의 첫 아씨고원, 마지막 아씨고원을 함께 한 고객이 되었다.

영광이다.

카자흐스탄 땅에 우리를 오랫동안 기억해 줄 사람을 일부러 만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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