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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 시내 돌아보기

너무 그리웠던 고려인 국시

by 해일


아씨고원 모험 덕분에 에어비앤비 숙소에 대한 애정도가 올라갔다.

언제까지고 집에만 있어도 될 것 같은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계획한 것이 있으므로 수행을 해야 했다.


1) 아침 산책 삼아 젠코프 성당에 갔다가,

2) 옆에 그린 바자르도 들러서 구경하다가,

3) 어제 보바씨가 추천해 주신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4) 커피 한잔하고,

5) 갈마트에서 장 보고,

6) 나중에 해 떨어지고 지면이 좀 식으면 아르바트로 잠깐 나가보든지.


이 정도면 <매우 탄탄한 계획>으로 분류된다.




[젠코프 성당]


숙소와는 도보 2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끝내주는 날씨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걸어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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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관광객이나 걸려라' 가게 / 아르바트 관통 중


아르바트에서 오른쪽으로 큰길이 나올 때까지 걸어간 뒤 왼쪽으로 돌아서 쭉 직진해도 젠코프성당이 있는 판필로프 공원까지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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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트 같은 잎 그림자


과연 알마티는 옛 수도답다.

가로수도, 공원에도 커다랗고 우거진 고목이 많다.

룸메는 시내에 이렇게나 녹지가 잘 조성되어 있다는 게 인상 깊다고 했다.

* 당시 아스타나에는 성냥개비 같은 나무가 많았고, 모스크바 시내에는 아예 숲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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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코프 성당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목조 건물이라고 한다.

건축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부분에서 오는 경이로움과 감동은 잘 와닿지 않았다.

* 안 예쁘다는 뜻은 아님. 무려 커스터드와 민트 조합이다.

오히려 성당 내부에서 간절함과 경외심 같은 것들이 실체를 가지고 흘러 다니고 있었다.


성당 방문하는 여성 동지들 머리 가리라고 들어가자마자 입구에 스카프가 많이 마련돼있다.

내부에서 고대 슬라브어 의미 때려 맞추기 놀이하다 보니 생각보다 오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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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옆 광장으로 나왔다.

사격장(ТИР) 앞에서 탱크 몰고 다니는 어린이를 볼 수 있다.





[꼭바자르(Көк базар), 즐룐니바자르(зелёный базар), 그린바자르(green bazaar), 초록이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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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돌려쓰면서 호객하는 곳일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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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이 맞다.


그냥은 구매하러 올 것 같지 않으나 보바씨가 소개해 주신 꿀 거래처가 있어서 찾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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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마주친 온갖 꾸르트와 치즈들이 익숙한 꼬랑내를 풍겼다.

쿠르트는 도전할 때마다 '이제는 먹을 수 있겠지?'라는 위험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하얀 탈을 쓰고 순수한 척하는 무언가이다.

* 문화체험용으로 사 온 거 아직 못 뜯었다.


고려인 반찬가게가 늘어선 곳 근처라고 했는데 과연 등을 맞대고 꿀 자매들이 앉아있었다.

어느 분이 그분인지 알 수가 없어 꿀러 한 분께 여쭤보니 바로 알려주셨다.

* 반찬 매대에는 고려인, 꿀 매대에는 슬라브계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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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씨에게 도달해서 보바씨 소개로 왔다고 인사했다.

둘은 무려 25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한다.


약꿀로 잘 퍼먹던 липовый(피나무꿀?)를 찾아봤는데 일단 러시아 바시키리아산은 알마티에서는 구하기 힘들고, 들어온다고 해도 오는 족족 다 나간다고 한다.


꿀시장에 가면 뇌까지 찌릿찌릿해지도록 꿀 시식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온갖 꿀 맛보기를 당했다.

마비되려는 혀를 진정시키기 위해 속도를 살짝 조절했다.

아냐씨가 심각하게 물어보셨다.


- 왜, 맛이 별로예요?

- 아니요, 그럴 리가요! 와 맛있다 으음~


꿀은 원하는 용량을 포장 용기에 담아서 살 수 있다.

이런 시장에서 꿀을 살 경우에는 공항 통관 관련 서류가 필요한데, 꿀 사장님께 요청하면 써주시니 문제없다고 설명 들었다.


온 김에 견과류나 건과일 사기 좋은 거래처 추천도 받기로 했다.

아냐씨는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셨다.


- 여기 1층에서는 절대 사지 말아요. 완전 관광객 상대로 하는 거라 바가지 씌우거든.


알려주신 대로 저 구석에 있는 철제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알마티 쇼핑 추천: 꿀, ??, ???]


지난 2022년 러시아 여행 이후였다.

마미는 러시아에 가면 다른 게 아니라 잣을 사야 한다는 점을 설파하고 다니셨다.

그도 그럴 것이 시장에서 본 잣의 맛과 (결정적으로) 가격에 반해서 10팩을 쿨결제하셨던 것이다.

* 온라인 쇼핑몰에서 시베리아 잣을 대충 찾아봐도 현재 기준으로 500g당 1,100루블 선에서 판매하고 있다(한화 18,000원 정도). 가평잣 가격은 같은 무게에 7만원이 넘던데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여기서도 잣을 사러 왔다.


깔끔한 위층에 비해 아래층은 확실히 좀 더 와일드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려가자 과연 견과류, 건과일류 매대가 네다섯 개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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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들어선 이후부터 내내 고객님들의 쇼핑을 위해 열심히 통역하고 있었다.

왜인지 짜증을 받는 것도 중간에서 열심히 전한 죄밖에 없는 통역의 몫.

물건을 보던 고객님들이 옆집으로 옮겨가자 상인 한 명이 삐져버려선 아쉬운 소리를 했다.

그런데 옆집 상품들이 정말로 더 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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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사장님은 상당히 좋은 잣을 보여주셨다.

확실히 알 크기가 다르다(오른쪽보다 왼쪽 잣봉다리가 더 좋은 것)

구매 수량과 건과일 추가 구매로 몇 번 네고를 거쳤다.

현재 매장에는 그만한 재고가 없어서 2~3일 뒤 미리 정확한 수량을 한 번 더 예약하고 찾으러 오는 걸로 했다.




그리고 건과일도 추천한다.

* 보통 독주에 곁들이는 안주로 견과류와 건과일을 같이 낸다. 땅콩스 먹다가 텁텁할 때 건포도 같은 거 투입하면 촉촉하게 먹을 수 있음.


ddju8mr50nq61.jpg 비극

위 이미지처럼 어릴 때 초코칩을 빙자한 건포도에 배신당했던 쓴 기억을 가진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후천성 건포도 극혐 증후군을 오래 앓아왔다.


그 증세를 상당히 호전시킨 건 카자흐스탄이 선사해 준 '궁극의 말린 포도'였다.

위스키바 같은 곳에서 고급 안주로 접한 것도 아니다.

현지 직원이 어느 날 투명 비닐봉다리에 달랑달랑 넣어와서 맛보라고 몇 개 줬을 뿐이다.

* 하지만 여전히 초코칩 쿠키를 선호한다.


청포도 말린 것도 있지만 까맣고 알이 큰 품종이 더 맛있다.

떠오르는 크기 비교 대상이 파리밖에 없어서 안타까운데, 보통 건포도가 일반 파리라면 추천 건포도는 날개 소리 짱 큰 왕파리정도 된다.

시식은 반드시 해보고 살 것.


데이츠(대추야자, финики-피니끼)는 여기저기 많으니까 패스하고,


건살구도 하나씩 주워 먹기 좋은 아이템이다.

달기만 한 게 아니라 적당히 새콤해서 잘 안 질리기 때문이다.

터키어로 '말리다'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어 '꾸라가(курага)'라고도 부른다.

보통 씨앗 없는 것을 접하기 쉬운데 씨앗 있는 거 먹어보니까 살구 감칠맛이 더 많이 난다.

역시나 맛을 보고 살 것.

SE-e772f4de-842d-49b5-9d5a-b827c6b97354.jpg?type=w773 맨 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홍시색 적혈구 옆)에 있는 씨 있는 살구 진짜 맛도리였음.




네고 마치고 명함 받아서 나오는 길에 채소 시장을 만났다.

어제 길가에서 들렀던 곳보다 더 싱싱하고 실하다.



너도나도 어지럽게 점원에게 구매의사를 어필하고 있었다.

질 수 없었다.

삵의 앞발처럼 커다랗고 딴딴한 통마늘 두 개를 들고 점원 앞으로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늘, 양파, 감자, 샐러드 채소, 킹고추를 구매할 수 있었다.

생존력이 더 강해진 기분으로 시장을 나섰다.


SE-e50f3202-b63e-419a-a012-873192c729e3.jpg?type=w773 블린니와 도나스(뽄치끼)는 지나쳐갈 수밖에 없었다.

시장도 더웠는데 차양 없는 곳으로 나오니까 아스팔트가 말 그대로 드글드글 끓고 있다.

바로 택시를 불러서 숙소에 채소 친구들 들여놓고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전날 아씨고원 가는 길]


- 저 국시 좋아해요. 보바씨가 맛있게 드셨던 집 있어요?

- 우리 국시가 한국에 있는 국수하고는 맛이 좀 많이 다를 텐데.

- 고려인 국시 말하는 거 맞아요. 여름마다 생각나거든요.

- 아 정말요? 맛있는 집 있죠. 그게 이름이 뭐였더라...


그는 친구 빠샤(Паша, 빠벨-Павель의 애칭)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 빠샤, 우리 국시 먹는 식당 있잖아. 거기 이름이 뭐였지?


고마운 빠샤 선생님은 'LEE HOUSE'라는 대답을 주셨다.

부디 감사를 전해달라고 부탁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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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HOUSE

이름 보면 편견 갖기 딱 좋을 것 같다.

달달한 김치찌개, 중국식 볶음면, 스시, 피자, 햄버거, 파스타 전부 취급할 것 같은 이미지.



하지만 보바씨의 추천을 등에 업었으므로 걱정 없이 당당히 입성했다.

* 이곳에서는 보신탕도 판매하는데 메뉴판에는 없다.

꽤 많은 손님이 반반 치킨과 김밥, 순대, 떡볶이를 먹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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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고르다 말고 한인 이주민들이 써온 단어들을 더 흥미롭게 구경했다.

경상도 방언에 고대 한국어의 흔적이 있다고 하던데, 고려인들이 쓰는 말을 들어봐도 한국어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해(хе)'는 '무침'에 가깝고,

'감지'는 '감자'(보바씨도 길가 감자밭을 가리키며 '감지밭'이라고 말씀하셨다),

'~무리'는 '~국밥'이다.

뿍쨔이(пуктяй, 된장찌개)처럼 그냥 들어서는 무엇인지 모를 단어도 있다.

메뉴 네 번째 사진 중간에 있는 веча(붸챠)는 발음 때려 맞춘 결과 외채, 즉 오이채 요리로 추정됨.


고사리(고사리), 시금치(시금치), 가지(가지), 고치잎(고춧잎)처럼 비슷한 단어도 많고,

김치를 '짐치'라고 하는 것은 내 할머니(고순도 경상도인) 발음과 유사하다.


이 이상 고립되지 않고 본국과 연결고리가 많이 생기기를 정말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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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국시와 삐고쟈 주문 완료

늘 먹던 식당이 아니므로 맛은 당연히 다르나 오이, 토마토, 딜, 소고기, 지단 고명이 조합된 감성은 제대로였다.

추억 보정까지 돼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삐고쟈(пегодя)도 과거 최애 메뉴 중 하나였음.

* 만두처럼 고기소가 들어간 감자떡이라고 보면 된다,

'삐고쟈'가 방언일 것 같아서 어쩌면 알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강원도 사람한테 비슷한 단어라도 들어본 적 없는지 물어봤는데 별 수확이 없었다.


* 250815) 안산에 '배고자(Pegodya)'라는 집이 검색되었다, 헐


2차로 달걀말이와 제육덮밥도 주문했는데 사진 찍을 새 없이 돌진해서 없애버렸다.

뜻밖의 달걀말이 맛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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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반찬은 당근김치, 양배추김치, 숙주나물이고, 더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다음 행선지는 걸어서 40분쯤 걸린다.

평소 같았으면 망설임 없이 걸어갈만한 거리다.

게다가 중간에 공원도 하나 있어서 식후 산책에 그만이다.


그러나 배 빵빵한 한국인 관광객 4명이 폭염에 쓰러진 채 발견됐다는 뉴스에 나오고 싶지는 않았다.

즉시 택시를 불렀다.


이제 커피를 한잔하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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