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Riding) 마(馬) 티(Training)
카자흐스탄 천산의 푸른 목걸이, 콜사이 호수 승마 체험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왼쪽 네 번째 발가락으로 쓴 시]
이것은 그날의 기억
카자흐스탄에서 우려낸 가장 농도 짙은 기억
다른 기억을 전부 덮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악독한 기억
'말' 한 마디로 흘러넘쳐 쏟아지는 잿빛 기억
이 기억을 공유한 이들과 짙은 전우애를 선물해 준 기억
이것은 그날의 기록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완전하지 못한 기록
기억의 잿빛 원액을 덮기는커녕 흉내 낼 수도 없는 가냘픈 기록
'글' 한 편이 흘러넘쳐 쏟아져도 맹맹하게 투명한 기록
언어의 한계라는 벽을 쌓아 기억과의 거리감을 만들어준 기록
그날이 차라리 예보대로 회색빛이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날은 기이할 정도로 파란 황금빛이었다.
눈이 시린 코발트 호수와 하늘을 향해 길게 뻗어가다 잘게 부서지는 날카로운 금의 파편들.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이래서 국기를 그렇게 그린거구나, 싶은 모습으로.
청년들은 네 사람과 말들을 번갈아보면서 하나하나 배정했다.
체형이나 몸집에 따라 골라주는 듯했다.
올라타보라고 했다가 다시 다른 친구로 교대시키기도 했다.
나한테 온 친구는 밀크캐러멜빛 다소 어려 보이는 수말 Khola*
* 홀라와 콜라 그 사이 발음이다. 다 내려와서 이름 물어봤음. 편의상 콜라라고 하겠음.
그리고 81% 다크초콜릿(다크), 하양이, 구구크러스트(구구), 첼로가 동행했다.
* 나머지 말들 이름은 생김새에 따라 임의로 붙인 것.
전원 무리 없이 말에 올랐다.
말이 생각보다 그루브를 타는 동물이었다는 것은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출퇴근길에 말을 타고 다니지 않는 한 결코 익숙할 수가 없는 움직임이다.
청년들은 첼로를 선두로 세우고 5마리의 줄을 엮었다.
포승줄로 엮여 연행되는 것 같았다.
가이드가 상당히 어려 보였는데 말 타는 건 아주 익숙한 듯했다.
* 실제로 오가는 길에 통신이 잡힐 때마다 기우뚱 앉은 자세로 편안하게 한 손으로 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전 안내는 간단했다.
허벅지를 말 몸통에 딱 붙이고, 내리막에서는 몸을 뒤로 젖히고, 오르막에서는 앞으로 숙이고.
고삐는 당기지 말되 그냥 잡고 있으라 하는데 콜라의 줄은 이미 팽팽했다.
잡기만 해도 콜라가 놀랄 것 같기에 물어보고 안장만 잡고 다녔음.
얘기하는 대로 통역해서 전달하고 출발했다.
보바씨는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며 영상도 찍어주셨다.
* 나중에 그는 버릴 옷으로 입는 게 좋다는 조언을 미처 못 해줬다고 했다. 왜 그런지는 충분히 경험했으니 이걸 읽는 분들께도 참고가 되면 좋겠다.
왕복으로 3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한다.
첼로(가이드) - 하양이 - 콜라 - 다크 - 구구 순서로 출발했다.
지도에서 경사를 추측할 수는 있겠으나 실제로 생긴 꼴을 볼 수는 없다.
* 후술하겠지만 사진은 도저히 찍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초반에 호숫가로 높이 올라가는 경사로는 자갈모래밭이었다.
비가 왔지만 충분히 건조되어서 스르륵 발굽 밑에서 미끄러져 흩어졌다.
잘 보니 스파이크 편자를 신고 있었지만 아무런 가드레일이라든지 안전장치는 없었음.
두 발이 무사히 땅에 붙어있다 해도 일부러 오르내릴 것 같지 않은 첫 경사로를 오르고 내려갔다.
구르면 겁나 아프겠다기보다는 삐뽀삐뽀할 것 같았다.
전날 보트 타고 닿았던 반대편 끝으로 진입했다.
야들야들한 완두콩빛 햇빛을 받으며 얕은 물을 건너가면서 슬쩍 긴장을 풀었다.
자연 속에 푹 파묻힌 채 반지 하나 들고 다니는 호빗이 된 기분 정도였다.
그대로 산길로 진입했다가 초원길로 나왔다.
어느 정도 평지에서는 다섯이 일제히 퐁퐁퐁 뛰던데 아마 그렇게 교육받은 것 같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 뒤로도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 세뇌시키던 순간도 많았지만 돌아보니 거기까지였다.
애초에 출발하는 길부터 상당히 가파르고 좁았다.
그런 길이 끝까지 이어진다는 안내와 예상은 어디에도 없었고,
조금만 삐끗해도 멋지게 구를 수 있는 찬스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 이후로 복귀까지 5시간 동안 일어난 사건을 순서대로 나열해 봤다.
내 뒤에 있던 다크와 구구 사이를 연결하던 줄이었다.
구구는 황망히 서서 점점 멀어지는 대열을 바라보았다.
가이드를 불렀다.
그가 첼로에서 내려 구구를 데려오더니 줄을 다시 손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다섯 마리는 길 옆으로 널린 풀과 꽃을 신나게 뜯어먹었다.
예비로 가지고 있던 줄은 없었는지 다시 매듭을 짜맸다.
다섯 마리는 여전히 풀과 꽃을 신나게 뜯어먹고 있었다.
가이드는 수습을 마치고 짧은 채찍을 챙겨 출발했다.
그대로 50보쯤 더 갔다.
이번에는 콜라와 다크였다.
다섯 마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풀과 꽃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무아지경 콜라가 땅에 잠깐 놓아뒀던 채찍을 밟고 있어서 가이드가 낑낑대며 콜라의 뒷다리를 치웠다.
줄 수습은 영 어려워 보였다.
별 수 없었는지 가이드는 다크를 맨 앞으로 보내고는 궁딩이를 채찍으로 팡 치고 출발했다.
내 고객님을 태운 채 어디론가 뛰쳐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여기서는 가이드를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는 방향을 바꿀 땐 자동차 스티어링처럼 왼쪽/오른쪽으로 고삐를 다루면 된다고 추가로 알려줬다.
본격 가이드가 앞서지 않는 가이드 투어가 시작되었다.
다크 / 첼로(가이드) - 하양이 - 콜라 - 구구
소제목을 잘못 쓴 게 아니다.
그렇게 구구도 앞으로 갔다.
다크 / 구구 / 첼로(가이드) - 하양이 - 콜라
이윽고 나무 그림자가 어둑할 정도로 내려앉은 좁다란 숲길로 진입했다.
햇빛을 받지 못한 땅이라 땅이 질척했다.
돌들을 이리저리 피해서 잘 가는가 싶었는데 별안간 바위들이 박힌 땅이 나타났다.
심각한 부정교합인데다 크기도 크고 지면도 들쑥날쑥했다.
사람이 아닌 말의 걸음으로 어떻게 넘어가나 싶을 정도로.
다크와 구구와 첼로도 망설이긴 했지만 어떻게든 넘어가 저 편에서 다시 풀과 꽃을 뜯뜯하고 있었다.
다음 차례인 하양이는 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가이드가 하양이를 끌어가기 위해 다시 말에서 내려 첼로와 하양이를 잇던 줄을 풀었다.
그가 고삐를 잡아 끄는데 하양이가 버티기 시작했다.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하양이는 뒷다리를 낮춰 앉으면서 가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가이드는 하양이와 콜라를 잇던 줄도 풀었다.
그는 '야, 이 바보야!'를 외치며 하양이의 궁뎅이를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하양이는 반항하는 소리를 푹푹 뿜어냈다.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하양이를 탄 고객님이 자칫 다칠 수도 있었다.
콜라는 입에 풀을 문 채 그 장면을 바라보며 멀뚱멀뚱 서있었다.
하양이가 여전히 낑낑대고 있던 때였다.
저쪽에서 빨갛게 익은 사람 서넛이 커다란 등산 가방을 메고 오고 있었다.
아마 걸어서 콜사이 제2호수를 다녀오는 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는 하이킹 전용 경로라는 것이고,
하양이는 늘 가던 길이 아니기 때문에 격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거라는 결론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도저히 말을 타고는 못 갈 것 같은 길 상태도 이 가설을 적극 뒷받침했다.
* 그리고 잠시 후에 더욱 하드코어한 길을 가게 된다.
그 순간 등산객들이 러시아어로 쑥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저 사람들이 이렇게나 동물을 학대하는 게 정상이야? 불쌍한 말 같으니라고!
- 오 주여, 나 같으면 저렇게 못해. 이렇게 가당찮은 길로 말을 타고 가겠다니!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 진실로 세계는 넓으니 어디서나 말조심해야 한다.
보라색 민소매를 입은 여성이 인상을 쓰며 이쪽 '야만인'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당장 하양이가 잔뜩 꿀렁대는 판국에 지금 우리도 학대당하는 중이라고 반박할 정신은 없었다.
* 원인을 찾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모두 자본주의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있었다.
뭐든지 사건은 단편적으로 보면 안 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대로 싹수 노란 동물 학대범이 되었다.
하양이는 거의 궁뎅이를 내린 채 질질 끌려서 겨우 내려갔다.
편자 스파이크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마침내 콜라가 지나갈 차례가 왔다.
콜라는 바위 앞에서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대로 휙 점프했다.
- 우웤컼!
승마 산행에 이어 승마 점프도 낯설다.
장기들이 위로 솟았다가 쿵 내려앉았다.
한때 다녔던 스크린 승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수상한 길은 계속되었다.
걸어가는 사람들과 자꾸 만나면서 이동하고 있었다.
말들도 낯선지 멈췄다가, 걸었다가를 반복했다.
가이드가 하던 것처럼 '츄츗' 소리를 내어가며 콜라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 그는 바람 새는 소리가 아니라 확실한 발음을 내줘야 한다고 조언해 줬다.
형광 주황색 티셔츠를 입고 벙거지 모자를 쓴 턱수염 등산객과 세 번쯤 다시 만났을 때, 이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윽고 물살이 약하지 않은 계곡에 도달하자, 말들은 더욱 낯선 경로에 어쩔 줄 모르는 듯했다.
그때였다.
- 너희, 거기서 뭐해??
거센 계곡 소리를 순간 삼켜버린 낮고 깊은 목소리였다.(계속)
과거 평야, 고원, 산맥 이리저리 말 발굽이 닿는대로 뛰어다니던 기마 민족은 어쩌다 앉아서 컴퓨터를 두들기며 떡볶이와 치킨을 배달 시켜먹게 되었을까.
소위 그 '발전'의 결과로 오늘과 같은 참극이 빚어진 건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여기까지 정말 쉽지 않은 여정이라고도 생각했지만 그건 확실히 틀렸다.
앞으로 펼쳐질 오프로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우리는 감히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