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티의 진정한 의미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서 별 보기는 무슨, 푹 잤다.
산 날씨는 역시 종잡을 수 없다.
내내 있었던 비 예보가 무색하게 햇빛에 잠을 깰 정도였다.
안 그래도 미세먼지는 없었겠지만 마지막 말털가닥 하나까지 바닥으로 축 가라앉은 듯 쾌청한 날씨다.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잠깐 산책을 나갔다.
보트와 사람이 없고 바람도 없었는지 호수가 굉장히 잔잔했다.
숙박하는 자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며 호숫가로 돌아다녔다.
'덩그러니'같은 숙소 식당/카페 건물(왼쪽)
지금 이 시간이라면 배경에 걸리는 것 없이 사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호숫가 맞은편에는 굉장히 강해야만 살아남는 시절을 보냈을 것 같은 나무 밑동 하나
예쁘고 맛없을 것처럼 생긴ㅋㅋ물고기 비늘색
윤슬이 얼마나 환상적이었는지 내가 까마귀인가 싶었음.
색 조화가 마음에 들어서 찍었는데 다시 보니까 디바우러같다.
예쁜 거 밑에 징그러운 거
산책만 했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나있었다.
신선놀음 베타 버전이 이렇지 않을까.
곧 숙소 식당 앞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보바씨였다.
오전 10시쯤 콜사이 제2호수 쪽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8시쯤부터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선물로 사 온 약과 한 묶음과 차 세트를 선물로 드렸는데 맛있게 먹었다고 따봉해주심.
* 근처에서 1박 하고 오셨다.
숙박에 포함된 아침식사도 훌륭했다.
보통 조식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뷔페식으로 골고루 준비돼있다.
엊저녁 인사한 싹싹한 직원이 바우르삭을 하나 집어서 접시에 올려주셨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식사에 곁들이는 거라고 설명을 덧붙이면서.
정말 보기 드문 청년일세, 같은 소리를 자꾸 하게 만드심.
룸메는 여기서 인생 포리지(=까샤)를 만났다.
그는 평생 포리지를 종이죽 맛으로 알고 살아왔다.
방 빼고 짐 맡긴 후 전날 1차로 흥정했던 승마체험 장소로 갔다.
전날 계시던 아저씨가 안 계시고 다른 청년들이 무더기로 서있었다.
청년들한테 둘러싸인 채 어제 얘기 마쳤다고 한참을 설명해야 했다.
* 콜사이 제2호수까지 다녀오는 코스로, 제1호수 부근 곳곳에 지점이 있는데 가격은 말 맞춘 듯 일제히 1인 25,000텡게다. 15,000텡게까지 합의했다.
이윽고 가이드 한 명과 말을 한 마리씩 배정받았다.
나를 감당하거나 내가 감당할 말은 밀크캐러멜색이었다.
이름은 나중에 물어보니까 Khola라고 함.
그리고 이건 무사히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 쓰는 게시글이다.
콜사이 어드벤처를 이번 편에 담기에는 빠듯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어딜 가나 말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말 등에 오른 순간으로부터 5시간이 훌쩍 지난 시점에 후들대는 다리로 식당 근처에 서있었다.
고객님께 따뜻한 게 필요해 보여서 밀크티를 테이크아웃했다.
그리고 5시간이 소요될 줄은 전혀 몰랐으므로 아예 식사를 하고 출발하기로 했다.
의도치 않게 여행 와서 세 끼 연속 같은 곳을 가게 되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졸지에 5시간 넘게 추가로 기다린 보바씨도 합석해서 피자를 포함해 안 먹어본 메뉴와 뜨거운 만둣국을 주문했다.
콜사이 어드벤처 전체 줄거리와 클라이맥스, 비하인드씬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으면서 진정해갔다.
맡겨둔 짐을 찾고 다시 숙소 픽업 차량에 올라 출발했다.
아씨고원 이후로 또다시 현실 세계가 낯선 기분이었다.
(우리가.... 아늑한 사륜구동 차를 타고 아스팔트 도로를 평안히 달리고 있어....?)
알마티의 뜻은 이제 '사과 아저씨' 따위가 아니다.
알(Riding) 마(馬) 티(Training)
원안에 따르면 알마티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블랙 캐년과 차른캐년에 들러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내일모레치 체력을 모조리 끌어다 쓴 현 상황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블랙 캐년에서는 여기 왔다 감, 느낌으로 사진만 대충 남겼다.
* 어차피 규모가 큰 계곡은 아니다.
머지않아 도착한 차른 캐년에서도 입장료 받는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그나마 힘이 남은 청년들만 계곡 아래로 나서봤다.
첫인상은 화성(Марс).
야생 설치류가 새끼들을 데리고 관광객들의 시선을 즐기며 뽀로로로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부한까(=푸르공)의 퍼스널 컬러는 이곳 풍경이다.
현장에서 투어가 가능한 것 같은데, 마냥 관광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 관뒀다.
아침부터 늦오후까지 봐온 풍경만 해도 소다빛 호수, 압도적인 침엽수림, 말과 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초원으로 극단적으로 휙휙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공간이라니, 정말로 카자흐스탄은 넓다.
어두워지기 직전에 출발했어도 알마티 도착은 밤 10시를 넘기고야 말았다.
보바씨에게 사례비를 드리고 작별 인사를 한 뒤 숙소로 들어갔다.
* 알마티 시민들의 밤마실에 대해 여쭤봤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당신 딸래미는 어제 새벽 2시에 돌아왔노라고 쿨하게 대답하셨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청년 둘이서 저녁거리 사냥하러 나감.
어차피 24시간 식당은 쌔고 쌨다.
터키 식당에 가서 언젠가는 소개하려던 샤우르마를 세 개 포장했다.
소고기, 닭고기, 반반으로.
기다리는 동안 메뉴판을 구경했는데 다른 음식도 괜찮아 보였다.
일단 푹 자고 일어난 뒤 여유롭게 여기서 브런치하기로 했다.
* 어두운 밤색 머리를 길게 땋은 한 어린이가 다가와 수줍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Hi(한 박자 쉬고), I like your hair color!" 나는 파란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러블리.
숙소로 통하는 마트에서 과거에 달고 살았던 라이몬 프레쉬 구매.
민트맛 존재감이 강한 모히토 맛이다.
그리고 무사히 귀가했다.
굉장한 모험을 마친 뒤 저녁까지 거른 상태에서 자정이 거의 다 된 순간에 맛이 없는 것은 없다.
실제로 이 시간에 샤우르마를 제일 자주 먹곤 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골든타임에 샤우르마를 먹는 경험을 하다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