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Riding) 마(馬) 티(Training)
2편 소제목의 소제목은 '귀인과 불편한 진실' 정도면 될 것 같다.
계곡물 한가운데에 군복을 입은 풍채 좋은 이가 밀크초콜릿글레이즈(말털에 건강한 윤기가 좔좔 흘렀다) 말을 탄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마유주와 꾸르트 향이 살살 풍겨왔다.
- 너희, 거기서 뭐해??
- (가이드) 길을 잃었어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세요?
- 내가 ##지점까지 가니까 거기까지 두 마리 정도 인솔해 준다. 나머지 데리고 따라와. 어잇!
카자흐스탄어라 알아듣지 못했지만, 왜인지 해석이 술술 됐다.
어잇! 소리에 다섯 마리 모두가 일제히 반응하여 따랐다.
쿠르트향, 군복, 풍채, 반짝반짝한 말, 기합, 통솔력... 모든 요소가 이 사람이 엄청난 베테랑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필시 이 상황을 보다 못한 하늘이 보내주신 구원자이다.
우리는 건너편 자갈밭을 따라 올라와서 이 계곡을 건넜어야 했던 걸로 보였다.
* 복귀할 때는 말들이 알아서 바른 길을 찾아갔다.
용사는 다크와 콜라를 이끌며 제대로 된 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첼로, 하양이, 구구가 저 뒤에서 따라오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새로운 경로는 그저 말들이 잘 아는 길일뿐, 절대 평탄하지 않았다.
그 어느 등산 경험에서도 이 정도 험지와 경사는 마주친 적이 없었다.
눈앞에 거의 수직으로 보이는 것 같은 바위흙길에서 승마라니.
빗물에 흙은 질척하게 밀려나가고, 날카로운 바위에 발굽이 미끄러지는 순간이 잦아졌다.
* 이 와중에 용사는 중간에 합류한 누군가를 텐덤까지 하고 있었다.
말들도 힘든지 방구를 뿡뿡 뀌어댔다.
엄청난 오르막이라 콜라의 목에 기대 있다시피 하고 있어 앞서가던 다크의 방구소리가 스테레오 사운드로 들렸다.
말을 타고 오를 바에 네 발로 기어서 가는 게 정신 건강에 더 이로울 것 같다.
높이 앉은 채로 움직임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은 생각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미끄러져 자빠지면 저 바위 중 하나는 무조건 머리통과 찐하게 박치기할 구도였다.
박치기와 동시에 버둥대며 떨어지는 콜라에게 깔리는 시나리오도 훤히 보였다.
용사는 간헐적으로 어잇!을 외치며 다크와 콜라가 계속 가도록 했다.
수십 번은 이런 산을 넘어 다닌 것 같은 그 단호함이 그나마 안정감을 줬다.
덕분에 콜라에게 찰싹 붙어서 잠시 생각할 수 있었다.
갑자기 이 미끄러운 오르막을 최악이라고 부를 이유가 사라졌다.
나중에는 여길 내리막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어디선가 툭, 투둑하는가 싶더니 숲 전체에 쌀이 잔뜩 쏟아져내리는 소리가 났다.
용사는 글레이즈와 다크, 콜라를 풍성한 나뭇가지 아래로 피신시켰다.
그는 카자흐스탄 억양이 강한 러시아어로 말을 걸었다.
-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 한국이요.
- 승마체험할 만합니까?
- 오, 네, 할만하네요. 하하.
여기까지 온 마당에 힘들다고 투덜대는 건 무의미할뿐더러, 국적을 밝힌 이상 절대 나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기마 천재 고구려인의 피를 징징이로 만들 수는 없었다.
첼로, 하양이, 구구는 한참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다가온 그들은 콜사이의 깨끗하고 차가운 비에 푹 젖어있었다.
오자마자 하양이에게서 결국 사고가 하나 발생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편도로만 써도 좁은 길을 왕복으로 사용한다는 게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말들은 걷거나 달릴 때 태운 사람까지 고려하지는 않는다.
길이 좁아 바위나 나무에 사람 다리가 걸린다거나, 말의 머리에는 걸리지 않는 나뭇가지가 사람 목 부위를 지나간다는 건 말들이 신경 쓸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양이를 마주 지나가던 어떤 말의 몸통에 고객님 왼다리가 걸리는 바람에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지셨다.
다행히 바위나 단단한 물체 위로 떨어지지는 앉았지만 정말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앞으로 갈 길이 한참 더 남았으나 돌아가기는 더욱 쉽지 않은 지점이었다.
어느 순간 용사님은 다른 길로 사라지셨고, 가이드가 다시 인솔했다.
이렇게나 신비로운 등장과 마무리라니.
용사님은 정말로 하늘이 보낸 이었다.
첼로(가이드) / 다크 / 구구 / 하양이 / 콜라
여전히 심술궂게 생긴 길이었지만 어느 순간 경사가 급격히 완만해졌다.
이정도면 포장도로다.
게다가 이제 아는 길을 걷는 말들은 아까보다 순했다.
내리막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이 평화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가 싶더니 커다란 호수가 오른쪽에서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콜사이 제2호수에 당도했다.
두껍던 구름이 살짝씩 뒤척이면서 햇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여우비가 총총 내렸다.
개인적으로는 제2호수가 더 마음에 들었다.
개방감이 제1호수보다 훌륭하고,
호수 맞은편 언덕은 하이디가 껄껄껄 웃으며 굴러내려올 것만 같은 절경이었으며,
호숫가 풀밭도 앉아서 멍 때리기에 최적화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비를 피해 말들을 나무 아래에 주차했다.
첼로, 다크, 하양이, 구구 모두 차례로 나란히 서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한편 나의 콜라는 한참 전에 탈선했다.
비가 내리든 말든 풍성한 풀과 꽃을 앙냥냥 뜯으며 길 밖으로 계속 벗어났다.
고삐를 다른 방향으로 당기고 가자는 메시지를 보내도 소용없었다.
배가 많이 고픈가 보다, 하고 풀 뜯는 ASMR을 즐겼다.
그때 저- 멀리 언덕 위에 주차되어 있던 누군가의 말이 푸르르르으르렁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콜라가 그쪽으로 고개를 번쩍 들더니 처음 듣는 소리로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으르렁과 으르렁이 오가는 상황이 두세 번 반복되었다.
콜라가 저쪽 언덕으로 질주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고삐를 최대한 당길 준비를 했다.
말 싸움에 사람 등 터진 사례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전에 가이드가 콜라를 데리러 왔다.
기포가 보글보글 끓던 콜라는 다시 얌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말도 꽤나 제대로 된 으르렁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학습했다.
발굽에서 튄 진흙과 비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사진을 남겼다.
제대로 말을 타고 온 모습이라 거짓 없는 사진들이 나왔다.
비와 햇빛을 같이 맞으며 언덕과 호숫가도 걸어보고, 수고한 말들의 눈도 하나하나 마주쳐봤다.
이 친구들이 얼마나 자주 다녔으면 이 험악한 산길을 다 익혔을까.
추워서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던 가이드에게 질문했다.
- 여긴 얼마나 자주 다니세요?
- 저 여기 처음인데요.
순간 세상이 잠시 느린 화면으로 보였다.
길을 잃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대부분 승마 경험이 부족한 관광객들에게(심지어 두 사람은 나이가 많다), 이런 산길을, 아무 보호장비나 가드레일도 없이, 통제가 완전히 되지 않는 말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 무경험 가이드를 붙였다.
다시금 이곳의 관광산업이 굴러가는 모습에 감탄했다.
이 충격적인 진실은 일단 나 혼자 품고 있기로 했다.
괜히 알려서 멘탈을 쪼갰다가는 전원 무사 복귀가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곳은 한참 넋 놓고 앉아만 있어도 마냥 좋을 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쉬워도 재빨리 떠나야 했다.
말이나 도보 외에 다른 이동 수단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고, 어두워지면 답이 없다.
더욱이 다시 흐려지고 있었기에 새파래진 입술로 말에 올라 출발했다.
가이드는 첼로 대신 다크에 올랐고, 하양이, 구구, 첼로가 앞장섰다.
그는 '위', '오른', '왼', '앞'을 한국어로 어떻게 말하냐고 물었다.
그렇게 복귀길 방향을 한국어로 안내받기 시작했다.
딱 예상한 만큼만 긴장감 넘치는 내리막이었다.
* 애초에 그 예상 자체를 아주 크게 부풀려 놓긴 했었다.
내 발로도 걸어서는 못 가는 경사로였고(걸으려다 중력에 몸이 쏠려서 우다다 해야 함), 미끄러운 바위를 긁는 편자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바로 앞에 가던 다크가 뒷발로 꽃송이를 날려서 선물해 줬다.
오르는 길에서도 봤지만 콜라는 똑똑하다.
앞서가는 말이 어떻게 가든 간에 따라가지 않고 덜 힘든 곳, 덜 질퍽한 땅으로 발을 디딘다.
다른 말들도 그렇지만 온갖 장애물이 즐비한 길을 어떻게든 잘 피해 가는 것도 기특하다.
매번 목을 쓰다듬으며 칭찬을 날렸다.
그리고 콜라는 점프를 좋아한다.
이러한 콜라의 진가는 내리막에서 발휘되었다.
앞서가는 말이 조심조심 경사로를 걸어내려갈 때 콜라는 이를 따라가지 않고 점프를 한다.
대응 방법을 나름 적용해 봤으나 익숙하지 않았다.
착지할 때마다 입 밖으로 십이지장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꽤 두꺼운 나무 줄기가 오른쪽 정강이에 닿았다.
콜라 : ?? 알빠노
말은 당연히 그대로 가던 길을 갔고 우두둑, 커다란 멍이 남았다.
질긴 청바지가 아니라 반바지였더라면 살이 꽤나 아프게 찢어졌을 것 같다.
어드벤처를 마친 후 이야기를 나눠보니 말들 모두 제각각 성격대로 내려온 모양이다.
콜라는 점프를 했다.
구구와 첼로는 서로 경쟁심리 발동해서 중간중간 아찔한 레이스를 벌였다.
중2병이 세게 온 듯한 하양이는 눈앞에 놓인 편한 길을 자꾸 외면하고 울퉁불퉁한 쪽으로 빠졌고, 자꾸만 멈춰 서는 바람에 결국 저 뒤에 처져서 안 보이게 되었다.
첼로 / 구구 ////// 다크 / 콜라 /////////////////////////////////////////////// 하양이
이윽고 콜사이 제1호수로 들어가는 하구에 도달했다.
하루 새 익숙해졌던 파란색이 시야로 쏟아져들어왔다.
'천산의 푸른 목걸이'라는 별명은 이 머크우드를 지나온 자들이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레이스를 벌이던 구구와 첼로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고, 가이드는 연신 뒤로 돌아보며 하양이의 위치를 확인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가서야 하구를 건너는 하얀 점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가이드가 폰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언덕의 자갈모래 경사로에서 수직과는 거리가 멀게 기울어진 상태로 얼마간 서 있었다.
안장을 잡은 손에 힘을 빼면 곧장 뒤로 미끄럼 타고 굴러내려가서 하양이와 쉽게 재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말들을 만난 곳이 아닌 숙소 식당 앞에 있는 역(驛)에서 내리고 싶었다.
두 지점 사이는 지나온 거리에 비할 바 없이 짧은 구간이었지만 가능하다면 그러길 바랐다.
가이드는 딱 적절한 타이밍에 여기서 내릴래?라고 제안했다.
* 콜라의 이름을 이때 물어보고 인사했다.
식당 앞쪽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무릎과 손가락 마디가 욱신대기 시작했다.
하양이까지 도착하고 마침내 제 발로 다시 땅을 밟게 된 전원이 후들대며 익숙한 곳으로 모였다.
모두가 잠시 넋을 잃은 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윽고 한여름 낮에 소나기 내리듯 일제히 적극적이고 열렬히 뜨거운 감상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 뒤는 알마티 5일차의 기록대로 흘러갔다.
비록 전원 멍투성이가 되었지만 그 이상으로 다치지 않은 것에 깊이 감사했다.
위 모험은 잠시 후 식당에서도, 저녁에도, 이튿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귀국 후에도 여러 날에 걸쳐서 언급되었으며,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카자흐스탄 콜사이 호수에서 승마 체험을 하려는 이들은 이 글을 필독해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콜사이 호수 곳곳에 붙여놔도 손색없는 경고문이다.
제주도 승마 체험은 회전목마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