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동안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나름의 자리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했다. 10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학생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수십 번 반복하며, 강의평가라는 시험대에 올라서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강의평가 점수가 다음 학기 수업 시수를 결정하고, 그것이 곧 생존과 직결된다는 현실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번 학기는 달랐다. 새로 들어온 젊은 남자 선생님 때문이었다. 훈남에 근육질 몸매, 거기다 20대라는 젊음까지. 그는 모든 조건을 갖춘 완벽한 경쟁자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대부분 여학생들이다. 그리고 한국어 강사들 역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런 여초 환경에서 젊고 잘생긴 남자 선생님의 등장은 마치 사막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희소성이 만드는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내가 담임을 맡은 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선은 온통 그 선생님에게 쏠려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그의 주변에는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질문이라는 핑계로 끊임없이 관심을 표현했다. 나는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젊으니까 그럴 수 있지'라며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속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데 왜 학생들의 반응은 이렇게 다를까? 나는 경력도 더 많고 노하우도 풍부한데, 왜 학생들은 그를 더 좋아할까?
학생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들'이라며 속으로 욕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 역시 미워졌다. 별것도 아닌 농담에 키득거리는 학생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정적인 순간은 마지막 종강식이었다. 담임인 나에게는 사진을 찍자고 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그냥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말과 함께 뜨뜨미지근한 작별을 했을 뿐이다.
반면 그 선생님 주변에는 우리 반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반 학생들까지 몰려들어 사진을 찍자고 아우성이었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팥쥐언니가 된 기분이었다. 콩쥐가 왕자와 결혼하는 것을 지켜보는 팥쥐언니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그날 밤, 집에 돌아와 혼자 있으면서 문득 20대 강사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그때 학생들이 나에게 약간의 관심을 보여줬었다. 선물도 가끔 받았고, 사진도 찍자고 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관심을 순수하게 즐기지 못했다.
고참 선배들의 눈초리가 무서웠다. 층층시하 시어머니, 시누이 같은 선배 강사들이 나를 질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주는 선물을 받을 때도 어딘지 모르게 미안하고 부담스러웠다. 그 관심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마워할 줄 몰랐다.
40대 후반이 된 지금, 나는 비로소 그때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다. 학생들의 순수한 관심과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변의 시선만 신경 쓰느라 정작 소중한 것을 놓쳤던 것이다.
이제는 학생들의 그런 관심이 대단히 그립다. 나를 보는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빛, 수업이 끝나고도 질문을 가지고 다가오는 적극성, 작은 선물을 건네며 부끄러워하는 미소들.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사실 한국어 강사들 사이의 경쟁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같은 반에서 같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은 더욱 첨예하게 대립한다. 학생들의 사랑을 받는 선생님과 그렇지 못한 선생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우리는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게 지내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누가 더 인기가 많은지, 누가 더 높은 강의평가를 받을지, 누가 다음 학기에 더 많은 수업을 배정받을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관심사다.
또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가장 큰 변화는 학생들과의 거리감이다. 20대에는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서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학생들이 나를 어머니 같은 존재로 본다. 존경하지만 거리를 두는 그런 존재 말이다.
젊은 남자 선생님에게는 설렘을, 나에게는 안정감을 찾는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번 학기 학생들과 뜨뜨미지근한 작별을 하고 나니, 다음 학기 만날 학생들이 더욱 궁금해진다. 과연 나는 그들에게 어떤 선생님으로 기억될까?
이제는 알겠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가면 된다는 것을. 젊음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대신, 나이듦이 주는 깊이와 여유를 무기로 삼으면 된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팥쥐언니가 되지 않겠다. 질투와 시기로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대신, 후배들의 성공을 축하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현명한 언니가 되겠다. 팥쥐언니 같은 질투쟁이 강사였던 나는 이제 성숙한 교육자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것이 19년의 경험이 내게 주는 착한 콩쥐같은 마음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