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대영 May 23. 2020

박영숙의 페미니즘, 변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코로나19로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가운데

사람들이 하나 둘 햇볕과 바람을 즐기러 나오는 요즘이다.


필자 역시 지난 4개월 간의 칩거 아닌 칩거 생활을 참다 못해 오늘 삼청동으로 나왔다.


삼청동은 현재 갤러리현대 50주년 기획전으로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날 역시 너무나도 긴 줄에 결국 관람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결론적으로는 해피엔딩.


이날 방문한 갤러리들 중 눈에 띄는 전시를 소개한다.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박영숙의 '그림자의 눈물'이다.

박영숙 '그림자의 눈물' [사진=고데영]

1세대 페미니스트 작가로 유명한 박영숙 작가는 그간 여성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인물 위주 사진 작품들을 다뤄온 인물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선 인물을 배제하고, 자연과 자연이라는 공간 속에서 상징성을 띄는 물건들에 포커스를 맞췄다.


사실 자연이라고 했지만 작품 속 자연은 그냥 자연이 아니다.


배경은 제주도 곶자왈.


곶자왈은 제주방언으로 '가시덤불 숲', 쓸모 없어진 땅으로 통한다.


그 가시덤불 수풀 사이로 작가는 그간 여성성을 대표하던, 옥죄어오던 상징들을 곳곳에 배치한다.


웨딩 드레스, 옷 핀, 분첩 등등.


잡아먹을 듯한 가시덤불 수풀은 시간이 만들어온 자연스러운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인간 사회가 방치한, 무책임한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기간을 사람으로, 남자로, 여자로 살아오면서 이 공간을 마치 원래 그랬던 것 마냥 자연스러운 질서로 오인한다.


그러한 사회적 방치의 현장에서의 유리병 속 코르셋은 어쩌면 현재의 불협화음 속 한국 사회를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코르셋으로 가득찬 유리병을 수풀은 그저 바라보고 즐긴다. 그 유리병은 질서 없는 수풀 사이사이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더욱 조여오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코르셋에 상처를 입는다.


다치는 건 유리병일 뿐, 수풀은 다치지 않는다.


유리병이 코르셋을 뱉어내기 위해선 결국 몸부림을 쳐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병 스스로를 깨뜨려 꺼내놓는 방법까지도.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작품 속 또 한 가지 특징을 찾자면, 수풀은 작품 전체를 가득히 덮고 있지만 코르셋은 주로 주변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끝없이 주변인으로서 상처를 품에 안고 수풀더미 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번 전시다.


우린 언제까지 이 더럽혀지고 질서없는 가시덤불 수풀을 우리 본연의 삶으로 인식하고 막연히 살 것인가.


수풀은 그대로 놔두면 더 지독한 수풀이 된다.

박영숙 '그림자의 눈물' [사진=고데영]

과거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인물 사진으로 페미니즘을 드러냈던 작가가 이번과 같이 변화를 준 데는 어쩌면 사회 속 페미니즘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겠다. 한국 사회에서의 페미니즘도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세고 강한 것을 지나 인간의 삶 자체에 녹아드려는 문화적 요인이 부각되는 양상이니.


전시는 6월 6일까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무료.

매거진의 이전글 레안드로 에를리치, 그 현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