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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신형철 그리고 임철우

by 이매송이

고3 때 채식주의자를 읽다가 포기한 이후, 나는 서점의 ㅎ 가까이도 가지 않았다. 그 혹은 그녀인지도 모를 한강의 글이 내게 폭력적으로 다가 와서, 접고는 다시 펴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작가가 누군지도 확인 하지 않고, 순간순간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책을 모두 읽어 냈다. 마지막 장을 펴서야 이것이 그녀의 소설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접혔던 쪽은 열어 볼 수 없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소식에 어쩔 수 없이 ‘작별하지 않는다’를 마주하게 되었다. 5월 광주도 겨우 소화한 내가 4월의 제주를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만약 신형철 선생님의 문장이 아니었다면 시작 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들 곁의 소설가 '나'는 생사의 경계 혹은 그 너머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는 듯이,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가장 결연한 답변이 여기에 있다. (신형철)



그 이후 폭력을 이겨 내고자 폭력을 갈기갈기 살펴 본다는 한강의 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다.


한강 작가가 존경한다는 임철우 선생님은 그 때 광주를 기억하고 써 내려간 나의 스승이다. 얼마간의 분노 보다는 죄책감으로, 잊혀지지 않도록, 잔뜩 퍼져 있는 피의 냄새를 맡으며 쓰셨다.



신형철 선생님을 생각하면 학생과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키가 크고 제법 마른 그러나 단단한 나무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 학기가 끝나고 학교 앞 막걸리 집에서 뒷풀이를 할 때, 옆자리에 앉아 노래를 좋아하시냐는 나의 말에 끄덕이며 대학 생활을 이야기해 주셨다.

임철우 선생님은 소설을 쓸 때 등장하는 어떤 이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내가 지어낸 인물일지라도 종이 안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이므로, 독자를 사로잡기 위한 카드로 쓰지 말라 하셨다. 몇 번이고 되돌아 봐도 죽음 밖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을 때, 그때 적으라고 말하셨다.

친한 언니는 최수철 선생님을 따랐는데, 임 선생님과는 전혀 다른 창작법을 사용하셨다. 나는 그 길을 가지 않았고, 그래서 졸업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을 쓰고 지우고, 나를 설득 시키고 상대에게 이해 시키고, 낱말 하나에도 수십 번의 질문을 했다.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의 시작은 결핍이라고, 나는

완전히 믿고 있다. 진짜 글, 가짜 글이 있겠냐마는 적어도 생을 바쳐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나가는 이라면, 적는 내내 기쁨 보다는 고통이 대부분을 차지 한다면 그들은 나와 같은 궤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고집스러운 마음일 수도 있으나 문학은 내게 구원이고, 어쩌면 작은 자살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와 소설이 나를 부른 것이다. 때로는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돌아 왔다. 누군가 내게 삶이 무엇이냐 물으면 문학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 안에 정답은 없을지라도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생을 구하는 방법이 있다고 1초의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불분명한 세상에서 늘 흔들리는 나라는 사람이 유일하게 오롯한 순간이다.






*‘갈기갈기’란 표현은 내가 해석한 방식이다.

**작은 자살이라는 단어는 미국의 작가이며 사회 운동가인 Susan Sontag의 말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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