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림월 Nov 18. 2024

구토 2024 #2

오늘은 친구 은범의 스튜디오로 촬영을 간다. 그는 20만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유튜버인데,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는 최근 국내 최대규모의 패션 플랫폼과 협업하여 립밤을 만들었다, 제품은 출시 한 달 전부터 구매 예약을 시작하여 현재는 공장에서 제작한 초도물량을 훨씬 웃도는 구매대기를 확보한 상태이다. 오늘은 그의 SNS에 실릴 홍보 사진을 찍기로 했다. 모델은 그의 아내이다. 둘은 결혼한 지 2년가량 되었는데 아내는 연애의 관련된 심리학 기반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SNS 인플루언서이다. 말은 심리학 기반이라고 하지만 결국 본질은 자기 계발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나는 자기 계발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계발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싫어진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랄까. 그래서 애초에 공백으로 남겨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공허한 기분이 짙어지는데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비 내리는 강변북로는 운치가 있다. 거기에 나쁘지 않은 플레이리스트. 방금 뿌린 나쁘지 않은 향기. 나쁘지 않은 오늘의 분위기. 결국엔 그날의 분위기다. 나는 한 가지의 좋음보다 나쁘지 않은 열 가지를 원한다. 인생은 원래 좋은 걸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나쁜 걸 어떻게 버티느냐의 싸움이라는 걸 어떤 소설에서 본 것 같기도.


은범의 스튜디오는 연남동 잿빛소음이라는 건물 지하에 있다. 그 3층짜리 건물은 꽤 유명한 음악프로듀서의 작업실로 쓰였었는데, 그가 뉴질랜드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매물로 나와서 누군가 건물을 개조한 다음 세를 주고 있었다. 나는 그 근처에 가기만 해도 야릇해지고는 하는데 이유는 밀폐된 지하공간에서만 맡을 수 있는 눅진한 냄새와 눈이 시릴 듯 안 시린 할로겐 조명이 만들어내는 명도가 후각과 시각을 지배하는 걸 넘어 모든 감각들을 열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처음 느껴본 오르가슴처럼. 남자에게 있어서 오르가슴이라면 사정의 순간을 연상케 하는데 나는 생애 처음으로 사정을 한 곳이 지하 오락실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고등학생인 어떤 누나에게 이끌려서 들어간 지하에 어느 한 구석에서 낡은 담배 연기를 맡으며 흥분됐던 내 말초신경은 그 시간 이후로 건강한 도파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조금 더 자극적이고 그보다 더 도발적이며 극명한 선정성과 농밀한 뇌쇄를 동반한 흥분 상태만을 원하도록 길들여져 버렸다. 이건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이분법적인 논리로는 설득되지 않는다. 숨길 수 없는 본능이 잉태된 것뿐이다. 나라는 존재가 이성보다는 본능에 더 충실한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기에는 근거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훨씬 더 편하다.

타인이 나를 평가하는 건 그들의 몫일테고 그 무게를 굳이 짊어지기보다는 그들에게 양보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미덕이니까.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입구는 ㄱ 자 형식의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경사가 생각보다 가파르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어느 날 어떤 여자 모델이 생각 없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비싼 앞니 두 개를 날려버린 이후로 은범은 계단 입구에 조심이라는 푯말을 대문짝만 하게 만들어 시야에 잘 보이는 위치에 붙여두었다. 그래봤자 인간이라는 망각의 동물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계단을 내려가서 유리문을 열어젖히니 문에 달려있는 작은 방울이 흔들리며 야단스러운 소리를 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소리를 듣고 시선이 마주친 은범과 눈인사를 한다.


"왔어?"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지만 사계절 내내 은범은 검은색 반팔차림이다. 검은 뿔테안경과 포마드로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칼은 언제 봐도 샤프한 이미지의 그와 잘 어울린다.


"야. 근데 무슨 촬영을 저녁에 하냐?"


"어. 와이프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어차피 마무리 작업이라 금방 끝날 거야."


"아, 누나는?"


"너무 민낯이라 화장 좀 하겠대. 오랜만에 너 본다고 그래도 이쁘게 보이고 싶나 봐. 유부녀들 원래 유난이잖아."


"내가 유부녀의 생활을 어떻게 알고 있냐?"


"아무튼 넌 결혼하지 마. 특히나 성향 같은 사람이랑은 더더욱 하지 마. 나라는 인간 하나도 벅찬데 마치 내가 두 명이 된 거 같다니까 피곤해. 이렇게 피로할 수가 없다."


은범의 아내는 우리보다 두 살 연상이다. 30대 후반으로 들어섰지만 20대라고 믿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는 게 누군가에게는 매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반대로 관리에 철저한 인물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뭘 그리 감추고 싶어서 자신을 포장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실수처럼 보이는 걸 더 선호한다. 서투르게 시작하는 섹스가 더 좋은 것처럼.

스튜디오 한 구석에 마련된 작은 부스에서 커튼을 열고 은범의 아내가 나온다. 오늘도 그녀의 차림새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레이 컬러의 슬랙스에 검은색 터틀넥에 포니테일의 헤어. 그녀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치마를 입지 않는다. 은범의 얘기로는 웨딩드레스 이후로 단 한 번도 치마를 안 입었다고 하니 그녀의 취향은 대쪽 같다. 그녀가 구석 소파에 앉으면서 나에게 인사한다.


"종익이 오랜만."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의 허벅지가 탐스럽다. 맨다리가 아니고 스타킹에 감싸여 있는 다리도 아니고 두꺼운 슬랙스에 감싸인 실루엣은 짧은 치마를 입은 다리보다 더욱 관능적이다.


"어. 누나 오랜만이네. 6개월 전에 표지 촬영하고 처음 보네요. 뒤풀이 때 못 가서 미안해요."


"그때 오지 그랬어. 너 좋아하는 와인 엄청 마셨는데."


"오늘 촬영 끝나고 마셔요. 은범이가 오늘 한 턱 쏜다고 했거든요."


은범의 눈빛에서 초조함이 보인다. 결혼을 하면 친구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맹세라도 하는 걸까.

그녀는 남편의 표정을 읽지 않는다.


"그거 은범이가 쏘는 거 아니야. 내가 쏘는 거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유부남에게 얻어먹는 건 한 명이 아닌 부부의 시간을 얻어먹는 것과 동시에 당신들의 지갑과 신경과 육체적 에너지를 낭비시키는 꼴이라 기쁘기보다 면구스러울 때가 더 많다.


"촬영 끝나고 우리 집으로 같이 가자."


초대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말투에서 미열을 머금은 흥분이 느껴졌다. 그 온도가 따분한 일상에서의 탈선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