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라는 건 나에게 있어서 돈벌이 수단 이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일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부여했다는 뜻이고 그 뜻을 지키기 위한 틀을 만들어내서 스스로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자신이 만든 지옥에서 헤어 나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일이 끝나면 곧바로 뇌의 전원 스위치를 꺼버리고 향락을 즐긴다. 라캉이 고통스러운 쾌락을 향락이라고 정의했다면 나에게 있어서 향락이란 아주 근본적인 쾌락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처음 보는 여자와 잔다던지, 그것도 아니면 좋아하는 술을 아낌없이 먹는다던지 등등.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희喜와 락樂을 가능한 만큼 수용한다. 기쁨을 누릴 줄 아는 권리와 기쁨만 누릴 권리는 그 낙차가 본래 큰 것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별하는 것 또한 현대 지성인이 가져야 할 미덕이다.
몰두해서 자기 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사람이 가장 섹시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은범은 카메라를 들었을 때 가장 섹시하고 그의 아내는 아, 그녀의 이름을 말했던가. 그녀의 이름은 수진이다. 도경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로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가장 아름답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아름다운 것을 해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황무지에 피어있는 단 한송이의 꽃을 꺾어버리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망쳐버리고 안정된 곳에서 탈출하려 하는 이상한 습성을 가진 인간은 상식적인 선에서는 이해하기 까다롭다. 하지만 비상식과 상식 사이에서 절묘하고도 아찔한 줄타기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것을 충분히 상쇄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동기부여는 단 하나뿐이다. 이 외줄 타기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과 믿음. 그리고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뜻이 통하는 누군가 그 손을 잡아줄 거라는 가능성. 형태가 없는 가능성이란 눈이 부실정도로 무궁무진하다.
나는 카메라 앞에 서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저 자신감을 망가트릴 수 있는 구체적이고 우아한 방식을 고민하게 된다. 아름다움이 훼손된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 순종을 할까. 아니면 집착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게 될까.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그들의 집으로 왔다. 부부는 낡은 아파트를 싸게 매매해서 인테리어를 바꿨다. 거실에는 목재로 만들어진 커다란 실링팬이 돌아가고 곳곳에 관엽식물들이 놓여 있어서 집안 분위기가 아주 산뜻했다.
진녹색 4인용 소파에는 엠보싱이 나와있어서 이탈리아 어느 마을에서 볼 법한 오래된 유물처럼 보였다.
우리는 거실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리오하 와인과 말보로의 화이트와인을 은범의 아내인 수진이 나를 위해 준비해 주었다. 우리는 올리브 오일에 소금과 후추 다진 마늘과 꿀을 섞어서 드레싱을 만들었고 배달앱으로 시킨 소라와 문어숙회에 곁들여 먹었다. 어느 정도 술자리가 익어갈 때쯤에 거실창으로 비치는 셋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이미지는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과도 같이 선연한 색과 완벽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 어느 거장의 유작처럼 예술성을 미묘하게 숨기고 있는 것이다. 나와 은범과 그의 아내 이렇게만 보면 이상할 게 없는 그림이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예술작품들은 고뇌하게 만든다. 문학이든 무용이든 미술이든 의도된 정지와 침묵을 통해 표면적인 요소들을 삭제한다. 예술에 대한 해석은 각양각색이겠으나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 하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자신도 그 소수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예술은 그렇게 완성된다. 다수가 아닌 소수의 힘으로.
새벽 1시쯤 은범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소파에 누웠다. 대화의 맞장구를 쳐주던 그는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은범의 코 고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그녀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시선 아래쪽으로는 회색 천 쪼가리에 가려진 그녀의 허벅지 실루엣이 들어왔다. 나는 슬며시 그 위에 손을 얹는다. 내 손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그녀가 말했다.
"가끔 망가지고 싶을 때가 있어."
"자신을 증오해서?"
"어떻게 알았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좋게 보진 않아요. 그것을 드러내는가 아닌가의 차이지만."
"내가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좋게 바라봐주잖아. 그게 죽도록 싫을 때가 있거든. 당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닐 텐데. 혹시나 그들이 내 진짜 모습을 보고 실망하면 어쩔까 하는 고민이 들면 말이야. 절벽 끝에 서있는 기분이야. 나아지기 위해 한 걸음 디뎠을 뿐인데 벼랑아래로 떨어지는 거지. 완벽해야지만 살아낼 수 있는 인생은 너무 한심한 거 아닐까? 과거들이 나를 짓누르는 힘이 점점 무겁게 느껴져."
"괜찮아요. 과거가 무겁게 느껴진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이죠. 그게 당신의 레종 데트르니까."
"존재의 이유?"
"빙고."
그녀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내 입술에 키스했다. 촉촉한 혀의 감촉은 언제라도 황홀하다. 내가 빨아들인 것이 그녀의 혀가 아니라 그녀의 전체 같았다. 혀 끝에서는 단맛이 계속 솟아났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입 안 구석구석에 새로운 자극점들이 매번 존재한다는 사실은 육체적 접촉의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나는 그들의 침대에서 또 한 번의 일상 탈출에 성공했다. 친구의 아내와 자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드냐고? 내 존재가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랄까. 절정에 도달할 때의 느껴지는 상대방의 체온은 자신의 존재도 덕분에 가득 채워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레종 데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