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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Nov 18. 2024

구토 2024 #4

눈을 떠보니 다행히도 나는 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굳게 닫힌 커튼 틈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걸 보니 아침까지 술을 마신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실 한복판에는 세 개의 맥주캔과 두 개의 빈 소주병과 글렌 모렌지 빈 병 하나가 나란히 줄지어서 나를 반겼다. 왼쪽부터 맥주캔이 있었으니 어제는 맥주를 마시고 다음으로 소주 그다음은 위스키 순서로 마셨을 것이다. 은범의 집에서는 와인만 마셨고 그의 아내와 섹스를 끝내고 난 뒤 취기가 사라졌으니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일탈의 한 끗을 더하고 싶은 마음에 폭음을 한 것이 틀림없다. 어느 소설에서는 대학생인 주인공이 자신이 좋아하는 학교 선배와 길거리의 아무 여자와 술을 마시고 호텔방에서 섹스를 한다. 주인공은 선배에게 묻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숙취와 함께 자기혐오와 공허함이 밀려온다고. 선배는 답한다. 그런 걸 공허하다고 느낀다면 넌 아주 바람직한 인간이라는 뜻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단 한 번도 혐오와 공허함을 느껴본 적 없는 나는 어쩌면 신神이 어긋나게 만들었지도 모른다.


나는 숙취의 레벨을 1부터 3까지 지정해 놓는데, 이유는 각 레벨마다 먹어야 할 음식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숙취의 고통이 가장 낮은 1 레벨은 국물만 있으면 평범한 식사로도 숙취해소를 할 수 있다. 2 레벨은 간에서 알코올을 분해하고 해독을 하면서 몸에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차가운 물냉면을 먹는다. 그리고 단말마를 외치게 하는 레벨 3은 이온음료를 충분히 마시고 속을 진정시킨 다음 짜장면을 먹는다. 나는 침대에 누워 배달앱을 눌러 중식 카테고리를 터치한다. 오늘은 레벨 3이다.

음식이 배달될 동안 욕실로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나는 뜨거운 것이 좋다. 여름에 카페에 가면 늘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의타적인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 도파민을 충족하기 위한 찬물샤워가 몸에 좋다고 밥 먹듯이 종용을 해도 나는 사계절 내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뜨거운 것 중에 최고는 사람의 체온이다.


누구나처럼 샤워를 마치고 거울로 나를 관찰한다. 178cm의 키에 78kg의 체중 나는 내 신체 밸런스에 아주 만족을 한다. 오랜 취미인 웨이트 트레이닝 덕분에 적지 않은 근육량을 가졌고 기초대사량이 높아서 쉽게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다.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는 낙천적인 성격 때문에 내 나이 때에 비하면 피부도 좋은 편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지만 잠들기 3시간 전에는 절대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복부지방도 덜하고 얼굴 생김새도 특별하게 못난 구석은 없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좋다. 나르시시즘과는 결이 다르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보다 우월한 이들이 등장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특정 이유를 만들어 비난하거나 등을 돌린다. 이건 질병이다. 그런 이들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뿐이다. 그들을 욕하거나 그들의 하수인이 되거나. 나는 다르다. 나의 하자와 한계도 충분히 알고 있고 나보다 뛰어난 이들이 옆에 있어도 그들의 능력을 인정할 뿐이지 괜히 의식을 하면서 센 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존중해 주고 함께하자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과 동일한 선상에 서고 싶어 하는데 방법을 모른다. 한 가지 방법이라면 인생은 짧으니 눈치 보지 말고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은 인간이 하지만 인생은 운명이 결정한다. 스스로가 선택한다고 믿지만 결국 운명이 내주는 예제들을 하나씩 풀고 있는 것뿐이다. 벌어질 일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벌어질 것이고 막아야만 하는 불행 같은 거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음식이 도착해서 거실 바닥에 앉아 포장을 벗겼다. 오늘은 신경 써서 해야 할 일도 누구를 만나야 하는 일도 없다. 오로지 나를 위한 안식일이다. 거실 창밖에는 비가 내리려는지 먹장구름이 낮게 깔려있다. 하늘만 보면 2년 전 여행을 같던 파리의 마레지구 같다. 파리에서 먹는 짜장면이라니. 말도 안 되는 상상에 헛웃음이 나왔다. 불붙은 상상에 향유를 붓고 싶어서 노트북으로 Yame의 Becane을 재생한다. 앞니가 빠진 저 흑인 래퍼는 면을 끊어 먹기가 힘드니까 짜장면은 못 먹겠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짜장면을 비벼서 젓가락으로 크게 집어 입속에 넣었다. 그리고 같이 시킨 탕수육 한 점도 입에 넣었다. 기름진 음식이 식도를 타고 위장에 도착하는 과정이 치유처럼 느껴졌고 독한 술과 위액으로 화상을 입은 위장에 재생연고를 바르는 것 같았다. 밥을 먹고 코인 세탁소에 가서 이불빨래를 하려고 했지만 탄수화물이 몸을 나른하게 만들어서 모든 게 귀찮아졌다. 그래서 스스로 핑곗거리를 찾던 중에 장대비가 쏟아졌으면 했는데, 거짓말처럼 한 줄기 빛에 먹구름이 갈라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외출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거친 뇌우에 휩쓸린 굵은 빗방울이 거실창에 두드리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완벽한 하루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전화가 오기 전까진 말이다.


잠에 들기 전 나는 이를 닦았다. 칫솔질을 한창 하던 중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구토를 했다. 원래 구토를 하기 전에는 메스꺼움을 동반한 울렁거림이라던지 헛구역질을 하게 마련인데 정말 아무런 전조도 없이 위장에 있던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근데 이상한 건 비현실적으로 많은 토사물이 변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너무 터무니없는 양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도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전날 과음도 했고 기름진 음식으로 과식까지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뒤처리를 말끔하게 하고 침대에 누웠을 때 그에게서 첫 번째 전화가 왔다. 휴대폰을 보니 저장이 안 되어 있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박종익 씨?"


"네."


"......."


3초쯤 뒤에 그쪽에서 먼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늦은 밤에 수상한 통화가 석연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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