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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Nov 18. 2024

구토 2024 #6

전화는 하루에 두 번씩 걸려 왔다. 정확한 시간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오전과 밤에 전화가 걸려 왔다. 늘 처음 보는 번호였고 사내는 항상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만 부르고 전화를 끊었다. 신기한 건 내가 사람들과 있거나 친구들의 아내와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을 귀신같이 찾아내서 그때마다 전화를 거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째서 혼자인 시간이 이토록 많을까 하는. 그때부터 이 사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경찰에 신고를 할까 생각했지만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됐다. 왜냐하면 장난전화로 경찰에 신고를 한다는 게 나로서는 스스로가 옹졸하고 졸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쁜 그들은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 장난전화요. 상대방 성함을 알려주시겠어요. 선생님 성함도요. 접수는 마쳤고요. 조사를 해보고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이런 사소한 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타개하고 싶었다. 그리고 전화를 회피하거나 차단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무언가를 쉽게 저버리는 인간은 아닌 것이다. 승산이 없는 것 같은 싸움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것을 용기 있는 항복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뚫어야 할 문제는 뚫는 게 나라는 인간이었고 나는 정면으로 길을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을 한 뒤로 정해진 하루의 일과처럼 전화를 받았다. 모르는 번호는 한결같이 그 사내였고 짧은 레퍼토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여보세요'와 '네' 두 가지에서 '네' 한 가지로 축소되었다. 구토 역시 끊임없이 이어졌다. 건강에 이상은 없는지 병원에 가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체중만 2kg 줄었을 뿐이었다.

통증도 없고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구토이지만 먹은 것을 다시 게워내는 게 반추동물의 되새김질처럼 느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액체로 되어 있는 곡물 셰이크나 두유 그리고 커피와 물만 마시게 되었다. 그러나 의문의 전화를 받고 나면 그것마저 내 식도를 타고 넘어왔고 이내 입 밖으로 모두 쏟아내었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맥주를 마셨고 저녁이 되면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셨다. 어차피 구토를 할 거라면 안 마시는 것 보다야 마시는 게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보름쯤 지나니 내 체중은 61kg 이 되었고 입던 옷들이 모두 맞지 않아 새로 옷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그래도 진행될 일들은 무사히 진행이 되었고 커리어에 문제가 생기거나 생계에 위협을 받지는 않았다. 대신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바디프로필을 준비하는 중이냐며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고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는 거짓된 대답만 반복했다. 내 호응에 그들은 부러워하는 눈초리로 일별 했다.


수진과는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났고 그때마다 예의 그녀와 섹스를 했다. 장소는 늘 내 집이었다. 그녀는 절정에 오를 때마다 내 귀에 "이 씨발놈아." 또는 "이 개 같은 자식."이라는 난폭한 언어를 내뱉었고 일이 끝난 뒤에는 다시 조숙한 숙녀로 돌아왔다.


전화와 구토가 지속되는 날들이 삼 주가 지났을 때 나는 테일러샵에 방문했다. 한 달 뒤에 있을 후배 결혼식에 입고 갈 슈트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슈트는 각기 다른 사이즈로 네 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살이 너무 빠지는 바람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진회색의 슈트를 맞추기로 결정했고 재단사는 제작기간이 삼 주가 소요된다고 말했다. 나는 삼 주 뒤에 찾으러 오겠다고 말하고 계산을 마친 뒤 샵을 나왔다. 생애 처음 찍어 보는 체중에 걸맞은 슈트를 맞추고 나니 무언가를 기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기념하는지 아리송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늦가을에 화창한 날씨는 걷기에 아주 적합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을지로에서 안국역까지 걸었다. 대부분의 영양소를 액체로만 섭취한 지  주가 넘어가면 생각보다 공복감 때문에 고통스럽지는 않다. 몸에 쌓여있는 지방들이 에너지원으로 활용이 되면서 몸이 가벼워진다. 소화에 소모될 에너지는 체내에 염증을 자가 치유하면서 피부 트러블이 사라지고 재생으로 인해 탄력이 생긴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손해보다 득이 많다고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사물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달라진다는 진리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걷고 싶어서 경복궁까지 걷기로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걷자마자 심각한 공복감이 밀려왔다.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공복감이라 아무거나 먹고 싶지 않았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알맞은 단계로 올바른 과정 속에 차곡차곡 음식을 위장에 채워 넣고 싶었다. 나는 택시를 불러 장충동에 위치한 호텔로 향했다.


다행히도 호텔에는 빈 객실이 남아있었다. 예약을 하지 않았지만 평일 오후에 호텔은 한적했기 때문에 컨시어지 데스크에서 바로 체크인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룻밤 묵는 비용치고는 비쌌지만 오랜만에 나에게 주는 선물의 비용으로 따졌을 때는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체크인을 서둘러 마치고 곧장 호텔 내에 중식당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지배인처럼 보이는 50대의 남자가 웃으면서 테이블까지 안내해 주었다. 메뉴판을 보고 게살수프와 난자완스 동파육을 시킨 뒤에 식사로는 삼선짬뽕을 달라고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고 나서 속을 달래줄 부드러운 음식부터 먹기 시작했고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한 다음에 탄수화물로 식사를 마쳤다. 술을 한 잔 마실까 했지만 오랜만에 먹은 귀한 음식들을 알코올로 더럽히며 게워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계산을 마치고 객실로 올라갔다. 커튼을 열자 통유리창 밖으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일몰이 시작되는 시간이라 파란 하늘은 주홍빛 광휘로 점점 물들어가고 있었고, 도시의 크고 작은 색깔들이 하나둘씩 빛을 내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하루가 완벽한 하루로 순식간에 변용變容되는 찰나였다.


여분의 어둠이 드디어 도시에 내려앉았고 창 밖은 여백이 있었을 때 보다 더 분주한 것처럼 보였다. 오피스의 형광등은 꺼질 기미가 안 보였고 곳곳에 네온사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역동적으로 움직였으며 차량의 행렬들은 작은 불빛을 쏘아대며 각기 어디론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밤이 더 분주하게 보이는 이유는 숨겨놓은 욕망을 들킬까 봐 환한 대낮에 드러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욕망을 채우기 위함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자신만의 암흑 속에서 잽싸게 욕망을 채운 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둠 속을 통과한 다음 다시 환한 세상으로 빠져나가는 게 정직한 인간들의 일반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과연 정직한 인간인 것일까. 만약 어긋난 인간이라면 나는 이 세계에 더 이상 발 붙일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수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냐는 수진에 물음에 나는 사정을 설명했고 그녀는 호텔 근처니 금방 도착할 거라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잠시뒤에 수진이 도착했고 우리는 호텔에서 또 한 번 몸을 섞었다. 이번에는 내 귀에 친구의 이름이 얼핏 들렸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나니 허기가 졌다. 수진도 배가 고프다고 해서 우리는 택시를 타고 을지로에 가서 설렁탕과 수육을 먹었다. 그리고 늦은 밤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갔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꽤 피곤했다. 오랜 시간 걸었고 격렬한 섹스도 했으며 많은 양의 음식을 소화를 시키느라 진이 빠져버렸다. 씻지도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객실용 전화기가 울렸다. 나는 프런트에서 서비스 상태를 점검하는 전화라고 생각하고 무심결에 전화를 받았다.


"네."


"박종익 씨."


이런 젠장. 또 그 사내다. 나는 다시 한번 대답했다.


"네. 접니다."


3초 뒤에 전화가 끊어질 줄 알았지만 사내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사내의 물음에 나는 당황해서 새된 목소리가 나왔다.


"네, 네?"


"내가 누군지 알겠습니까?"


사내는 한번 더 물었다. 나는 순간 그가 누굴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 자신의 정체를 밝혀주길 간절히 바랐다.


"누, 누구신.."


내가 되묻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고개를 돌려 송화기를 쳐다보았다. 총알이 발사된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피워 오르듯 한 줄기의 침묵이 피워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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