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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Nov 18. 2024

구토 2024 #7

전화를 끊자마자 구토를 했다. 갑자기 밀려오는 구토 때문에 억지로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뛰어갔다. 다행히 객실 바닥은 더러워지지 않았지만 내 손과 입고 있던 상의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전화를 받으면 늘 구토를 한다. 전화기 속 남자가 심령처럼 내가 있는 쪽으로 넘어와 내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 구토를 유발하게 하는 것 같았다. 구토와 불길한 사내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상의를 대충 닦은 다음에 호텔 프런트로 내려갔다. 발신번호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프런트에서는 발신자 확인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허탈함만 안고 다시 객실로 올라왔다.


나는 침대 앉아 두 가지의 가설을 세워 보았다. 첫 번째 가설은 내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 정신질환은 스스로도 모르는 어떤 죄악감으로부터 유발된 것이다. 전화벨과 사내의 목소리는 환청이고 나는 대답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트리거가 되어 자연스럽게 구토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가설은 내 친구들 중 누군가 자신의 아내와 동침했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흥신소에 의뢰를 해서 나에게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토는 전화가 시작된 시기와 우연히 일치한 것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내가 현재 정신질환을 앓는 중이라면 내 주변인들이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낌새를 느끼고 나를 멀리하거나 아니면 치료를 권유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가설은 신빙성이 없었다. 두 번째 가설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흥신소에 의뢰를 한 것이라면 나를 단 번에 제압할 수 있는 물리적인 위협을 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비합리적인 선택이다. 결국 두 가지 가설 모두 쓸모없게 되어버렸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나는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설은 수 백 개라도 세울 수 있었지만 모두 이치에 맞지 않았고 어떤 논리도 해석도 설명도 취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우울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룸서비스로 작은 위스키 한 병을 시켰고 그것을 병 채로 들이킨 다음 앉은 채로 곯아떨어졌다.


호텔에서 전화를 받은 이후로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더 이상 불길한 전화도 오지 않았고 구토 역시 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정해진 지점에 뚫려있는 깊은 구멍 속으로 송두리째 빨려 들어간 것이다. 상실도 결락도 부재도 편집도 망실도 아니었다. 그곳에 존재한 것은 순수한 삭제와 순백의 소거뿐이었다. 마지막 통화를 끝낸 뒤부터 바닥에 오물들을 청소기가 빨아들인 것처럼 나의 주변환경이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었고 액체로만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덕에 내 체중은 금방 돌아왔고 주위에서는 살이 너무 빠진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바디프로필이 금방 끝나서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다.


한 달쯤 지나고 후배 결혼식에 참석했다. 애써 맞춘 슈트는 입을 수 없게 돼버려서 옷장에 기념품처럼 걸려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은범과 그의 아내 수진을 만났다. 그는 카멜색 코트에 여전히 검은색 반팔을 입고 있었고 수진 역시 슬랙스에 검은색 터틀넥 차림이었다.


"살쪘네?"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은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변한 게 없는데? 둘이 언제 만났었어?"


나는 아니라고 말했고 수진도 장난을 친 거라고 얘기했다. 둘은 다정해 보였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달콤함이 묻어났다. 나는 그들에게 축복을 빌어주었다. 은범은 낯부끄러운 말 좀 하지 말라며 멋쩍게 웃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그들은 한동안 궤도를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 튕겨져 나간다 해도 걱정은 없다. 둘 중 한 명이 손을 내밀 것이기 때문에. 둘은 약속이 있다며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멀어져 갔다. 수진은 고개만 돌려 나를 보더니 입술 위로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면서 미소 지었다.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거기에는 한 달 전 새로 맞춘 진회색 슈트가 걸려있었다. 기념비적인 그 슈트를 보고 있자니 나는 그 기간 동안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기묘한 전화와 구토가 한번 더 찾아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물론. 그때는 더 오랜 기간 나를 괴롭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유가 없이 끝난 것은 이유도 없이 시작되는 법이다.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신변에 일어날 수도 있다. 은범이나 그의 아내 수진에게 말이다.


나는 방 안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진회색 슈트를 슈트 케이스에 넣어 옷장 깊숙이 안 보이는 곳에 넣어두었다. 거실로 나오니 테이블 위에 휴대폰이 울렸다.

며칠 전에 섹스를 했던 친구의 아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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