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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아버지, 부모다움을 생각하다.

그 침묵 속의 사랑

by 서다움

어릴 적 나는 참 사랑받는 아이였다.


해외 건설근로자로 일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풍족하진 않아도 부족하지 않은 유년을 보냈다.


여섯 가구의 월세 수입이 있는 집,

무언가를 바라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던 시절이었다.


그땐 직항 비행이 없어 아버지는 늘 홍콩을 경유해 귀국하셨고,

경유지에 들러 딸을 위해 많은 선물을 사 오셨다.


나는 그 선물들을 친구들과 나누며 자랑했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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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매 중 하나뿐인 딸이어서였을까.

아버지는 어디든 나를 데려가셨고,

친척 집에 갈 때도, 경조사에 참석할 때도

언제나 내 손을 꼭 잡고 함께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생이 된 나는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고 느꼈다.


아버지는 큰 사고 후 회복되셨으나 한쪽 눈을 실명하셨고,

일을 그만두신 뒤

자신을 자책하며 조용히 소일거리를 찾아 리어카를 끌기 시작하셨다.


카세트테이프를 팔며,

동네를 하루 종일 돌아다니셨다.


예민한 사춘기의 나는

어느 날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학교를 나서다

그 길목에서 아버지를 마주쳤다.


나는… 아버지를 외면했다.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그냥 웃으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테이프가 제법 잘 팔리더라.”


왜 내가 외면했는지 묻지 않으셨고,

그 후 학교 근처엔 더는 오시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침묵이 얼마나 깊은 사랑이었는지.


이제는 여고생 딸을 둔 엄마가 되어,

그날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말하고 싶으셨을까.


그 침묵 속엔

책망도, 원망도 없었다.

오직 기다림과 이해만 있었다.


그게 부모다움이었구나.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닫는다.

너무 늦게, 너무 아프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아버지.

오늘따라 유독…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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