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에는 더 이상 욕조가 없다

얼마나 썼다고 그만둔다는 것인가

by 다두



그때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야

빨간 벽돌로 지은 빌라들이 길가에서 하숙집 간판을 걸고 있었는데

독방은 월 오만 원이고 합방은 삼만 원이었고

욕실은 공동이었어, 수리하고 나서는 바꿨나, 잘 모르겠다


지금과 다른 것은 그 좁은 욕실에 한 사람이 벗고 들어가 앉아도 넉넉할 만한 욕조가 있었다는 거지

당연히 화장실은 층마다 남녀 한 칸씩 공용이었고


참 이상한 것은 그런 데서 매일을 살고 나오는 그 여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보다 더 이뻤다는 거야

근처 굴레방 다리 밑에서 비너스가 광채를 발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다리 위 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등교하는 비너스를 기다렸고

빌라 옆 만화방에서 비너스의 귀가를 감시했는데

일부러 정체를 흘리는 아마추어만도 못한 스파이, 그런 모습이었지

비너스의 열정과 질투와 분노를 자극할 요량이었으니까


끔찍한 기억이지만

그 비너스는 끝내 어설픈 스파이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하더군

멍청하기 짝이 없는 비너스였어


십 년쯤 지나 알아챘지만

그 비너스는 사실 비너스가 아니었더라고 ㅎㅎ


신촌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어쭙잖은 전시회를 한다 해서 티맵을 틀고 찾아가다

같은 하숙집 간판을 봤네, 바로 엊그제 일이야


무슨, 장군의 아들을 찍느라고 만든 세트장도 아니고

달라진 것은 오만 원이 십오만 원이라고 에이포 용지 반 크기로 손으로 써서 덧붙여 있더구먼


지금 그 집서 사는 비너스는 그 비너스보다 세 배쯤은 더 이뻐야 쓸 텐데

아마도 지금은 욕조가 치워져서 샤워만 하고 댕기겠지


삼십 년쯤 지나야 비너슨지 아닌지 진위를 확인할 수 있으려나


올 가을은 작년보다 살짝 더 아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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