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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들deux맘 Sep 23. 2024

3.26kg으로 태어난 그와 지독한 사랑에 빠진 영숙씨

56년생 영숙 씨와 나는 생일이 같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영숙 씨는 음력생일을 쇠니 겹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딸과 엄마가 생일이 같다는 것 만으로 우리는 세상 그 어떤 모녀들보다 깊은 유대감을 자랑한다.

그런 내가 2015년 9월 첫날 3.26kg의 건강한 아들을 낳게 되었다.

"3월 26일이 생일인 56년생 영숙 씨가 43년 전 3월 26일에 건강한 딸을 낳았고 그 딸은 9년 전 3.26kg의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누군가에게는 억지스러울 수 있는 이 한 문장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하고 소중하여 늘 곱씹곤 한다.

철저한 계획파 남편은 그 당시 신학대학원 개강수련회에 빠지면 졸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을 예외 없이 지켰고 출산의 자리에는 남편이 아닌 영숙 씨가 나와 함께 있어 주었다.

8시간 진통을 겪는 동안 나는 영숙 씨의 두 팔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영숙 씨는 두 팔에 피멍이 드는 것도 모른 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주었고 진통의 시간이 무색하게 태아의 심장박동이상으로 인한 응급수술을 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3.26kg의 그와 만나게 되었다.

메마른 땅 요, 편지 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귀한 뜻으로 예수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사도요한의 이름을 딴 요한이는 그렇게 우리 가정의 귀한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어느 날 남편이 내게 말했다.

"여보, 나는 장인어른의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요한이 태어나고 처음 봤어. 지금 봐봐, 웃으시잖아. 진짜 신기해."

생각해 보니 나 역시도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그러나 요한이가 태어난 후 아버지는 늘 함박미소를 지었다.

요한이가 옹알이라도 할 때면 아버지는 내 깊은 잠재의식에서나 몇 번 들었을 법한 큰 웃음소리로 옹알이에 화답했다.  

하루에 한 번 목욕을 시키는 일도 56년생 영숙 씨의 몫이었다.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는 나에게 영숙 씨는 말했다.

"나 출산했을 때 네 외할머니가 다 해줘 가지고 나도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잖아. 재밌다야."

어느 날, 친정집으로 고급진 아기 원목침대가 도착했다.

목공을 취미로 가진 영숙 씨 친구의 선물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최신식 유모차가 도착을 했다.

역시 손주탄생의 고귀한 기쁨을 먼저 경험했던 영숙 씨 친구의 선물이었다.

나는 이렇게 과분한 선물들을 그냥 받아도 되냐고 물으니 영숙 씨는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영주야, 요즘은 친구들한테 돈 주고 손주 자랑해야 해. 그런데 요한이가 이렇게 이쁘니 지들이 선물 안 주고 배긴다니?

어느 날은 아기띠를 직접 멘 후 요한이를 둘러업고 동창회에 다녀오겠다는 영숙 씨를 보며 그 지독한 사랑에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야 말았다.


요한이를 임신한 당시 나는 남편과 함께 신학대학원에서 공부 중이었다.

점점 불러오는 배에 매 순간 감탄하며 나는 남편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며 신혼을 즐겼다.

특히 지금은 은퇴하신 최홍석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때면 뱃속 요한이가 어찌나 태동을 심하게 하는지 역시 교수님의 영성과 열정을 알아보는 듯했다.

정밀초음파 당시, 뇌실이 넓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실의에 빠지기도 잠시, 장애아를 키우는 신실한 믿음의 크리스천들의 생활을 유튜브로 엿보고 나니 나 역시도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급기야는 함께 공부하던 언니에게 당당히 고백하던 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언니, 나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도, 진짜 기쁨으로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자신 있어."

깊은 기도와 간절함 그리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살아가던 나에게 한 달 후 예약된 초음파를 더 일찍 보게 되는 계기가 생겼다.

신대원 체육대회 날, 성경만큼 각종 운동에 깊은 조예가 있는 많은 전도사님들의 경기가 진행된 후 그날 제공된 도시락을 먹고는 집단 식중독이 발발한  것이다.

도시락을 2개 먹고도 멀쩡했던 남편과는 달리 임신부였던 나는 반복되는 설사로 인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초음파를 해주던 의사는 별 말이 없다.

"선생님, 아기 괜찮나요? 한 달 전에 뇌실이 넓어서 안 좋으면 대학병원 가야 한 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아, 그랬어요? 잠시만요. 멀쩡한대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정밀초음파에 관한 이 모든 비하인드 스토리를 56년생 영숙 씨는 알지 못한다.

건강하든 조금은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았을 56년생 영숙 씨는 어떤 상황이든지 요한이에게 넘치는 사랑을 줬을 테니 말이다.  


첫 정(情)

첫 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나는 안다.

2살의 오빠를 두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외할머니.

오빠를 향한 외할머니의 그리움을 늘 지켜봐 왔던 나는 첫 정의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너무나 잘 안다.

때마다 시마다 박스테이프로 정성스레 칭칭 감겨 미국 시애틀에서 강북구 미아동 우리 집으로 배송되어 오는 새 옷과 먹을 것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으니 말이다.

늘 우리 집에는 '미제' 간식이 넘치고 넘쳤다.

대형 마트에 가면 비슷한 간식들이 얼핏 보이긴 했지만 우리가 먹는 그 간식은 다름 아닌 태평양을 건너온 지독한 사랑의 증표였다.

그 손주, 손녀가 장성하여 아이들을 낳았을 때도 외할머니는 여전히 선물박스를 보내주었다.

우리는 일흔이 훨씬 넘은 그녀의 대(代)를 이은 선물박스를 언박싱하던 설렘을 잊지 못한다.



얼마 전 나는 뱃속 8주 3일의 이삭이(태명)를 천국행 기차를 태워 보냈다.

그리고 이삭이는 천국에 평안히 안착했다.

4년 전 복덩이, 딱풀이를 연달아 천국에 보낸 후 세 번째 이별인 만큼 내게 느껴지는 허망함과 슬픔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임신을 알게 된 그날부터 천국에 가던 그 순간까지 우리는 함께 웃었다.

이삭은 히브리어의 영어 음역으로서 '그가 웃는다/웃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엄마의 임신소식이 너무나 기뻤던 둘째 노아는 금요기도회에 오신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에게 "우리 엄마 임신했어요!"라며 소리쳤고 함께 축하하며 축하받으며 그렇게 웃었다.

그리고 소중했던 여름휴가 중 이삭이는 우리와 함께 누리며 즐기며 그리고 웃으며 지내다 천국에 갔다.

빛나던 그 이름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웃음만 주고 떠났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 가정을 꾸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이들에게 그들을 반반씩 닮은 귀한 생명이 허락된다.

3억대 1의 기염을 토하는 경쟁률을 뚫고 좁디좁은 엄마의 자궁 안에서 10개월간을 유영하다 세상과 만난다.

나와 아빠는 발가락이 똑같이 생겼는데 요한이의 발가락 역시 내 발가락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닮아있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내주고도 더 내어주지 못해 못내 아쉬운

세상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그 사랑

"내가 낳은 새끼가 낳은  새끼는  더 예쁘다잖아!"라 외치며

오늘도 56년생 영숙씨는 내리사랑의 표본으로서의 그녀의 임무에 충실한다.

참 귀하고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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