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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들deux맘 Sep 16. 2024

눈 떠보니 목사사위, 사위인가 아들인가 헷갈리는 영숙

56년생 영숙 씨의 딸인 나는 절대 유행에 민감하지 않다.

각종 상을 휩쓴 영화가 있어도 굳이 몇 년 후에 보겠다는 쓸데없는 의지를 보이기도 하며 늘 한결같은 스타일의 옷을 추구하며 '유행은 돌고 돈다'를 몸소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영숙 씨의 딸이 어느 날 영숙 씨에게 묻는다.

한창 한혜진과 기성용의 8살 연상 연하 결혼이 핫한 화제가 되었을 무렵이다.

"엄마, 연상 연하 커플 어떻게 생각해?"

"뭐? 엄마는 아빠랑 6살 차이 나서 답답해 죽겠는데 좀 힘들지 않을까?"

"아니 남자가 연상인 거 말고, 요즘 유행이잖아. 여자가 연상인 커플말이야."



남편과 나는 교회에서 만났다.

남편은 교회에서 찬양인도를 하는 도중 예배당에 걸어 들어가는 나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 당시 남편이 전도사로 사역하던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남편에게 당부했다.

"전도사님, 이번 주일에 노처녀 한 명이 올 거예요. 오면 잘 좀 챙겨줘요."

과년하긴 했지만 그 당시 사회분위기를 가늠하여도 가히 노처녀 레벨에는 들지 않는다 당당히 말할 수 있던 30살의 나는 그렇게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밥 한번 먹어요." vs "제가 왜 전도사님하고 밥을 먹어요?"

밥 먹자! 싫다! 이 단순하도고 본능에 입각한 몇 개월간의 팽팽한 대립과 깊은 기도로 우리는 교제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남편은 성실히 군복무를 마치게 되었고 나 역시 서른 넘은 곰신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 몸이 되었다.

당시 했던 연상 연하 커플의 반열에 자랑스럽게 오른 우리는 1살도 2살도 아닌 자그마치 6살 연상 연하 커플로 당당히 세상에 커밍아웃하였다.


너무나 생생하여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남편과의 결혼을 56년생 영숙 씨에게 통보하던 순간이었다.

주일이 되면 영숙 씨는 모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딸을 보기 위하여 양재동 내가 출석하는 교회로 오곤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식의  대인배 마인드를 가진 나는 큰 고민 없이 엄마가 운전하던 차에서 남편과의 교제 및 결혼 계획을 통보했다.

56년생 영숙 씨는 그대로 운전대를 붙잡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잡고 있던 핸들이 뽑아져라 온몸을 흔들며 그렇게도 슬피 울었다.

나는 말없이 보조석에 앉아 엄마의 애통이 멈추기를 기다렸고 결국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명제를 다시 한번 각인시킨 날이 되었다.


부모님께 남편을 처음 소개하던 날, 나는 부모님과 함께 자주 가던 갈비탕집으로 갔다.

공군 약복을 입고 정갈한 모습으로 남편은 자연스럽게 부모님 앞에 착석했다.

그리고 휴가 나온 군인 아니랄까 봐 민간인의 고급 음식에 속하던 갈비탕을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가며 있게 먹는 행위에 집중했다.

흡사 첫 이병 휴가 나온 막둥이 아들과 함께 식사하는 평범한 가족의 모습처럼 그 어떤 긴장감도 없는 참 편안한 식사시간이었다.


남편과 내가 함께 공부하던 양지에 있는 한 신학대학원 5분 거리에 위치했던 우리만의 신혼집.

우리는 그곳에서 1년 남짓 산 후 출산으로 인한 휴학을 하며 친정부모님 댁으로 잠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원래 요리를 즐겨하던 영숙 씨는 백년손님 사위에게 소홀할리 없었다.

육해공은 기본이거니와 우리 집에서는 자주 먹지 않던 남편의 최애 음식 삼겹살이 나날이 냉장고에 쟁여지기 시작했다. 쌈에는 고추장과 함께 우리 집이 남편으로 인해 된장을 섞은 쌈장을 먹기 시작한 일부터  

세심하고도 큰 변화가 일게 되었고 늘 먹성 좋게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는 남편으로 인해 영숙 씨는 행복했다.


친정집에서 우리가 살던 방은 화장실 바로 앞, 한 두 걸음이면 닿는 곳이었다.

어느 날 두 시간 넘짓 먼 거리의 교회에서 사역하던 남편이 사역을 마치고 늦은 시간 집에 도착한 후 샤워를 했다.

다들 주무실 것이라 생각한 남편은 샤워 후 실오라기 걸치지 않고 한 걸음이면 당도할 방으로 들어가려고 한 바로 그 순간!!

이미 초저녁에 잠이 들었던 56년생 영숙 씨는 애써 눈을 비비고 힘들게 일어나 사역 후 돌아온 백년손님 사위를 맞이하려다 그만 못 볼 것을 보게 되었다.

'백년손님' 어려운 '사위'에서 진정한 '아들'의 위치로 승격되는 순간이었다.

어느 날 집 앞 새벽기도에 간 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으러 간 것도 내가 아닌 56년생 영숙 씨였다.

기도하고 오겠지, 뭐 별일 있겠어? 생각하며 염려와는 거리가 멀던 나와는 달리 56년생 영숙 씨는 아들 같은 사위를 걱정하며 한걸음에 달려갔다.

56년생 영숙 씨의 스마트폰, 차, 기타 등등 일상에서의 문제가 생기는 날이면 딸인 나 보다 남편을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나 역시 무엇이든 물어보면 뚝딱 알아내고 해결하는 남편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자잘한 모든 것은 다소 귀찮아하는 내가 너무나도 꼼꼼하고 철저한 남편을 만나 10년째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남편은 내게 늘 말한다.

"여보, 나중에 우리가 꼭 장인어른, 장모님 모시고 살자."

나는 피식 웃으며, 늘 화답한다.

"여보, 우리나 잘살자."

그러면 남편은 질세라 더 심각하게 대답한다.

"나는 꼭 장인어른, 장모님 모시고 살고 싶어."

어느새 난 남편의 진지함에 '엄마랑 살면 싸워, 아빠랑 둘이 알아서 잘 살 거야 걱정 마.' 기타 등등의 속마음을 살포시 넣어놓는다.

56년생 영숙 씨는 참 복도 많다.

그저 영숙 씨가 가지고 있던 사랑을 딸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조금이나마 표현했을 뿐인데, 난데없이 56년생 영숙 씨의 노후를 벌써부터 책임진단다.

빈말이라도 참 고맙다.

빈말이라는 단어선택에 '빈말 아니야!"라 말하며 격앙할 남편의 얼굴이 떠오를 정도로 남편은 진지하게 딸인 나보다 56년생 영숙 씨를 챙긴다.

"여보, 만약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살 거야? "우연히 물으니

"여보, 안 죽어. 걱정 마." 말하며 한마디를 살짝 덧붙인다.

"장모님이랑 살아야지. 장모님이 애들 봐주시면 나는 열심히 일하고."

56년생 영숙 씨는 오늘도 이렇게 진짜 '아들' 마인드를 가진 사위인지 아들인지 모를 내 남편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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