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은 영숙 씨
나는 아들 둘 엄마이다.
세상에 아들 둘을 가진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지 인터넷상에서 아이디나 닉네임을 만들 때 '아들 둘 맘'은 늘 선택이 불가하다.
아들투맘, 투아들맘, 둘 아들맘 기타 등등 이미 선택된 아이디를 뒤로한 채 급기야 나는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였던 프랑스어를 생각해 내었다.
그렇게 '아들 deux맘'이라는 나의 인터넷상의 닉네임이 탄생하게 되었다.
나의 브런치 닉네임도 '아들 deux맘'이다. Simple as that!
56년생 영숙 씨가 늘 내게 하는 얘기가 있다.
딸 둘은 금메달
딸 하나 아들하나는 은메달
아들 둘은 목메달!!
남편이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교회에 한 모임이 있다.
주로 남자 집사님들로 이루어져 있는 모임인데, 그 모임의 이름이 독특하다.
'우유부단'
- 우울한 유부남들의 부단한 노력이라는 뜻이란다.
어느 날 나는 모임을 만드신 집사님께 물었다.
"집사님 그 모임의 집사님들 중에 누가 제일 우울하신가요? 부목사 사모로서 알고 함께 기도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우선 딸 가진 아빠들은 우울을 논할 자격도 없고요. 아들 셋 가지신 **집사님이 지금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세상 많은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내게는 아들 둘을 키우는 기쁨이 세상의 그 어떤 행복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도대체 딸이 뭐길래?" 자문해 보지만 나 역시도 딸 없는 아들 둘 엄마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절대 알 수가 없다.
다만 56년생 영숙 씨의 딸로 43년을 살아가며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추측해 볼 뿐이다.
56년생 영숙 씨의 젊은 시절은 지금과는 달랐다.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사회적 용어가 생긴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56년생 영숙 씨도 둘째였던 내가 아들이 아니어서 서운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즐겨보던 꽤 파격적인 동시에 모두들 그러려니 공감하던 국민드라마가 있었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그 시절, 한 집에서 태어난 이란성쌍둥이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란성쌍둥이의 극 중 인물들의 이름만 보더라도 그 시절 남아선호사상이 얼마나 뿌리 깊이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있다.
이란성쌍둥이 중 아들의 이름은 귀남이, 딸의 이름은 후남이, 그리고 그 집의 막내딸 이름은 종말이다.
'가히' 한 배에서 나온 이름들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불행히도 우리 집 '귀남이' 2살 위의 나의 오빠는 집에서 자주 볼 수 없었다.
평일에는 학교 친구들과 농구를 하느라 늦은 저녁이 돼서야 집에 오곤 했고 토요일 주일에는 교회 전도사님, 교회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하며 시간을 보내느라 늦은 시간에 집에 오곤 했다.
어느 날 거실에 먹고 남은 치킨이 놓여 있을 때 오빠가 말했다.
"왜 매번 나만 빼고 치킨을 시켜 먹는 거야 정말?"
나는 "늘 집에 없는 건 오빠잖아.."라며 속으로 되뇌곤 했다.
E성향의 오빠와는 달리 I성향이었던 나는 늘 집순이였다.
친구들은 나를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가 아닌 하얀색 3층 건물인 우리 집에 자주 들르곤 했다.
건물 3층 내 방이 보이는 바로 그곳에 서서 내 이름을 부르곤 했다.
늘 변함없고 한결같이 나는 나의 사랑하는 내 '집'에서 친구들을 맞이했다.
밖보다 집이 좋았던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챙겼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의 루틴과 집안 곳곳의 모든 것까지 내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엄마 아빠가 새벽 일찍 일어나 대화를 시작하면 나는 그 대화소리를 알람 삼아 자연스럽게 기상했다.
방에서 몰래 엄마 아빠의 대화를 엿들어보기도 하고 거실로 내가 어떤 주제이든 물 흐르듯이 그 대화에 참여하며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부모님이 바쁘신대도 참 바르게 잘 큰다며 오빠와 나를 칭찬했다.
나는 보란 듯이 그 칭찬을 즐기며 내 나름대로의 입지를 굳혀갔다.
가세가 기울어 풍랑이 닥쳤을 때도 올곧이 내 본분에 충실하며 56년생 영숙 씨와 함께 긴 여정을 떠났다.
결혼을 하고 큰 아이를 출산했을 때 영숙 씨는 사랑으로 산후조리와 육아를 맡아주었다.
그러한 영숙 씨의 사랑에 보답을 하고 싶었던 나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나를 보며 56년생 영숙 씨는 어딜 가나 내 자랑을 하느라 바빴다.
나는 참 운이 좋았다.
영국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진입장벽이 낮은 학원강사의 길에 접어든 나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게 된 '김찬휘'라는 영어강사로 인해 대치동 입시학원가에서 일하게 되었다.
문법, 독해전문 남자강사진으로 포섭된 곳에 리스닝을 담당하게 될 산뜻한 여성 강사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렇게 난 일타강사의 새끼강사로, 일타강사의 등에 업혀 짧은 시간 안에 강사로 등단하게 되었다.
매 달 상상을 초월하는 급여가 들어왔다.
밤낮이 바뀌며 열심히 준비하여 강의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나는 순전히 운이었다 자족해 본다.
물론 사모가 된 지금은 그때의 일을 '하나님의 타이밍과 하나님의 일하심'이라 고백한다.
내 국민학교 졸업식 날,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했다.
물론 56년생 영숙 씨의 일방적인 입장표현이었을 것이다.
49년생 수환 씨는 영숙 씨에게 평생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서운함을 내 비친적이 없기 때문이다.
56년생 영숙 씨는 내 국민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늘 다니던 집 근처 신세계 백화점에 들렀다.
나는 내 선물을 사주려나? 내심 기대했지만 영숙 씨는 여성복이 있는 층으로 나를 데려갔다.
여러 가지 정장을 입어보더니 오렌지색 물방울 패턴의 나름 파격적인 바지 정장을 골랐다.
영숙 씨는 늘 그랬듯 아름다웠다.
화려한 패턴의 정장도 어울리는 영화배우 못지않은 모습이었다.
어린 나의 눈에는 그런 아름답고 당당한 엄마가 참 좋았다.
아낌없이 나를 사랑해 주고 그녀 자신도 못지않게 사랑하며 사는 그녀의 위풍당당함.
56년생 영숙 씨가 내게 물려준 위대한 유산이다.
난 아들 둘을 키우는 엄마라 행복하다.
남들은 내게 목메달이라 말하며 불쌍히 여길지라도 나는 아들 deux맘이라는 닉네임이 참 좋다.
56년생 영숙 씨도 오빠와 나를 키우며 참 행복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출산율이 급격하게 높아지자 정부에서 산아제한 정책을 놓았는데 그때의 구호들이 참 재밌다.
60년대의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로 시작해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70년대의 구호였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이었던 80년대에는 바로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
지금은 저출산을 넘어 초저출산 국가로의 위기를 맞고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여전히 '성별'은 중요한가 보다.
56년생 영숙 씨에게는 '잘 키운' 딸이 하나 있다.
잘 키웠다는 말의 정의를 잠시 생각해 본다.
그 딸의 학창 시절 별명은 '사줘!'였다.
부족함 없이 딸이 원하는 것을 다 사주곤 했다.
그 딸은 동네에서 예의 바르고 착하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영숙 씨는 딸에게 예절과 바름을 따로 가르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사랑밖에 줄 게 없는 사랑 많은 영숙 씨를 보며 수십 년간 시청각 공부를 해온 결과이다.
그 딸은 눈물이 참 많다.
소외되고 곤경에 처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대놓고 눈물을 흘리는 영숙 씨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난 늘 성장한다.
어린 시절에는 56년생 영숙 씨의 딸로서
지금은 목회자인 남편의 아내, 아들 둘의 엄마로서
난 늘 잘 성장하기 원한다.
날 이렇게나 '잘 키워준' 56년생 영숙 씨의 위대한 노고가 조금이라도 빛바래지지 않게
오늘하루 지금 이 순간에도 불철주야 고군분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