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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들deux맘 Sep 08. 2024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은 영숙 씨

나는 아들 둘 엄마이다.

세상에 아들 둘을 가진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지 인터넷상에서 아이디나 닉네임을 만들 때 '아들 둘 맘'은 늘 선택이 불가하다.

아들투맘, 투아들맘, 둘 아들맘 기타 등등 이미 선택된 아이디를 뒤로한 채 급기야 나는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였던 프랑스어를 생각해 내었다.

그렇게 '아들 deux맘'이라는 나의 인터넷상의 닉네임이 탄생하게 되었다.

나의 브런치 닉네임도 '아들 deux맘'이다. Simple as that!

56년생 영숙 씨가 늘 내게 하는 얘기가 있다.

딸 둘은 금메달

딸 하나 아들하나는 은메달

아들 둘은 목메달!!


남편이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교회에 한 모임이 있다.

주로 남자 집사님들로 이루어져 있는 모임인데, 그 모임의 이름이 독특하다.

'우유부단'

- 우울한 유부남들의 부단한 노력이라는 뜻이란다.

 어느 날 나는 모임을 만드신 집사님께 물었다.

"집사님 그 모임의 집사님들 중에 누가 제일 우울하신가요? 부목사 사모로서 알고 함께 기도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우선 딸 가진 아빠들은 우울을 논할 자격도 없고요. 아들 셋 가지신 **집사님이 지금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세상 많은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내게는 아들 둘을 키우는 기쁨이 세상의 그 어떤 행복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도대체 딸이 뭐길래?" 자문해 보지만 나 역시도 딸 없는 아들 둘 엄마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절대 알 수가 없다.

다만 56년생 영숙 씨의 딸로 43년을 살아가며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추측해 볼 뿐이다.


56년생 영숙 씨의 젊은 시절은 지금과는 달랐다.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사회적 용어가 생긴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56년생 영숙 씨도 둘째였던 내가 아들이 아니어서 서운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즐겨보던 꽤 파격적인 동시에 모두들 그러려니 공감하던 국민드라마가 있었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그 시절, 한 집에서 태어난 이란성쌍둥이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란성쌍둥이의 극 중 인물들의 이름만 보더라도 그 시절 남아선호사상이 얼마나 뿌리 깊이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있다.

이란성쌍둥이 중 아들의 이름은 귀남이, 딸의 이름은 후남이, 그리고 그 집의 막내딸 이름은 종말이다.

'가히' 한 배에서 나온 이름들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불행히도 우리 집 '귀남이' 2살 위의 나의 오빠는 집에서 자주 없었다.

평일에는 학교 친구들과 농구를 하느라 늦은 저녁이 돼서야 집에 오곤 했고 토요일 주일에는 교회 전도사님, 교회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하며 시간을 보내느라 늦은 시간에 집에 오곤 했다.

어느 날 거실에 먹고 남은 치킨이 놓여 있을 때 오빠가 말했다.

"왜 매번 나만 빼고 치킨을 시켜 먹는 거야 정말?"

나는 "늘 집에 없는 건 오빠잖아.."라며 속으로 되뇌곤 했다.

E성향의 오빠와는 달리 I성향이었던 나는 늘 집순이였다.

친구들은 나를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가 아닌 하얀색 3층 건물인 우리 집에 자주 들르곤 했다.

건물 3층 내 방이 보이는 바로 그곳에 서서 이름을 부르곤 했다.

늘 변함없고 한결같이 나는 나의 사랑하는 내 '집'에서 친구들을 맞이했다.

밖보다 집이 좋았던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챙겼다.

엄마 아빠 할아버지의 루틴과 집안 곳곳의 모든 것까지 내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엄마 아빠가 새벽 일찍 일어나 대화를 시작하면 나는 그 대화소리를 알람 삼아 자연스럽게 기상했다.

방에서 몰래 엄마 아빠의 대화를 엿들어보기도 하고 거실로 내가  어떤 주제이든 물 흐르듯이 그 대화에 참여하며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부모님이 바쁘신대도 참 바르게 잘 큰다며 오빠와 나를 칭찬했다.

나는 보란 듯이 칭찬을 즐기며 나름대로의 입지를 굳혀갔다.

가세가 기울어 풍랑이 닥쳤을 때도 올곧이 내 본분에 충실하며 56년생 영숙 씨와 함께 긴 여정을 떠났다.

결혼을 하고 큰 아이를 출산했을 때 영숙 씨는 사랑으로 산후조리와 육아를 맡아주었다.

그러한 영숙 씨의 사랑에 보답을 하고 싶었던 나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 나를 보며 56년생 영숙 씨는 어딜 가나 내 자랑을 하느라 바빴다.

나는 참 운이 좋았다.

영국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진입장벽이 낮은 학원강사의 길에 접어든 나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게 된 '김찬휘'라는 영어강사로 인해 대치동 입시학원가에서 일하게 되었다.

문법, 독해전문 남자강사진으로 포섭된 곳에 리스닝을 담당하게 될 산뜻한 여성 강사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렇게 난 일타강사의 새끼강사로, 일타강사의 등에 업혀 짧은 시간 안에 강사로 등단하게 되었다.

매 달 상상을 초월하는 급여가 들어왔다.

밤낮이 바뀌며 열심히 준비하여 강의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나는 순전히 운이었다 자족해 본다.

물론 사모가 지금은 그때의 일을 '하나님의 타이밍과 하나님의 일하심'이라 고백한다.



내 국민학교 졸업식 날,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했다.

물론 56년생 영숙 씨의 일방적인 입장표현이었을 것이다.

49년생 수환 씨는 영숙 씨에게 평생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서운함을 내 비친적이 없기 때문이다.

56년생 영숙 씨는 내 국민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늘 다니던 집 근처 신세계 백화점에 들렀다.

나는 내 선물을 사주려나? 내심 기대했지만 영숙 씨는 여성복이 있는 층으로 나를 데려갔다.

여러 가지 정장을 입어보더니 오렌지색 물방울 패턴의 나름 파격적인 바지 정장을 골랐다.

영숙 씨는 늘 그랬듯 아름다웠다.

화려한 패턴의 정장도 어울리는 영화배우 못지않은 모습이었다.

어린 나의 눈에는 그런 아름답고 당당한 엄마가 참 좋았다.

아낌없이 나를 사랑해 주고 그녀 자신도 못지않게 사랑하며 사는 그녀의 위풍당당함.

56년생 영숙 씨가 내게 물려준 위대한 유산이다.


난 아들 둘을 키우는 엄마라 행복하다.

남들은 내게 목메달이라 말하며 불쌍히 여길지라도 나는 아들 deux맘이라는 닉네임이 참 좋다.

56년생 영숙 씨도 오빠와 나를 키우며 참 행복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출산율이 급격하게 높아지자 정부에서 산아제한 정책을 놓았는데 그때의 구호들이 참 재밌다.

60년대의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로 시작해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70년대의 구호였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이었던 80년대에는 바로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

지금은 저출산을 넘어 초저출산 국가로의 위기를 맞고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여전히 '성별'은 중요한가 보다.



56년생 영숙 씨에게는 '잘 키운' 딸이 하나 있다.

잘 키웠다는 말의 정의를 잠시 생각해 본다.

그 딸의 학창 시절 별명은 '사줘!'였다.

부족함 없이 딸이 원하는 것을 다 사주곤 했다.

그 딸은 동네에서 예의 바르고 착하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영숙 씨는 딸에게 예절과 바름을 따로 가르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사랑밖에 줄 게 없는 사랑 많은 영숙 씨를 보며 수십 년간 시청각 공부를 해온 결과이다.

그 딸은 눈물이 참 많다.

소외되고 곤경에 처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대놓고 눈물을 흘리는 영숙 씨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난 늘 성장한다.

어린 시절에는 56년생 영숙 씨의 딸로서

지금은 목회자인 남편의 아내, 아들 둘의 엄마로서

난 늘 잘 성장하기 원한다.

날 이렇게나 '잘 키워준' 56년생 영숙 씨의 위대한 노고가 조금이라도 빛바래지지 않게

오늘하루 지금 이 순간에도 불철주야 고군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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