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손님 백년종년
“내가 한국에 들어갔을 때 수술하라고 했잖아요.
두 번이나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 안 해서 임신됐으니 어쩔 거예요??
종연은 피가 거꾸로 쏠릴 것 같은 분노로 휴대폰 넘어 손임에게 마구 소리 질렀다.
분명히 어플로 생리 주기와 배란일을 보면서 조심했는데도 생리가 늦춰져서 확인해 보니
임신이었다.
종연은 아이를 셋이나 낳고 피임까지 할 생각이 없었기에 손임의 시술을 종용했었다.
“나는 임신이 잘 되는 체질이라 우리가 안전장치를 하지 않으면 사랑이가 막내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면 꼭 시술받아요 제발.”
하지만 손임은 자기 몸에 칼 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가 조심할게.
내가 피임 도구 잘 사용하면 문제없을 거야.”
종연은 재차 말했다.
“이보세요. 그럼 나는 매달 생리가 하루 이틀 늦춰질 때마다 걱정하고 맘 졸여야 한다니까요.
제발 내 생각 좀 해 줘요.”
하지만 결국 손임은 시술하지 않았고 지금의 넷째가 뱃속에 둥지를 튼 것이다.
회사에 있던 손임은 휴대폰 너머 쩌렁쩌렁 울려 대는 종연의 샤우팅에 마음이 괴로웠다.
종연은 회사에서 바삐 퇴근한 손임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그러나 손임은 종연의 눈을 피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종연은 항상 오은영 박사님의 아동 상담 프로그램을 보면서 의아했다.
아이와 부모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솔루션을 제시한 후 그대로 실천하면 짜잔!! 하고 단번에 아이가 변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티브이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방송 사정상 어려울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오랜 기간 내면화 된 문제들이 공영 매체를 통해 단 1회 만에 수정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손임의 경우 책임지기 어렵고 부딪히고 싶지 않은 상황이 오면 회피하고 숨어버린다.
오랫동안 이러한 방어 기제를 가지고 살던 사람이 단번에 바뀌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전에 종연과 앞으로 당면한 문제를 피하지 않고 마주 하겠노라 굳게 다짐했던 손임은 다시 닥쳐버린 어려운 명제 앞에서 이전처럼 도망가는 것을 선택해 버렸다.
종연은 방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 있는 손임 앞에 앉았다.
종연은 이제 남편을 위한 존댓말을 버리기로 했다.
“너무 실망스럽고 비겁하다.
지금 자기가 나한테 이럴 때야?”
손임은 일어나 앉아서 종연에게 대꾸했다.
“어차피 나한테 짜증 낼 거 뻔하니까 그렇지.. 미안해.. 미안하다고.”
종연은 생명에 대한 손임의 한없이 가벼운 생각과 아내를 향한 무심함으로 인해 마음이 상한 채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고 나와 버렸다..
손임은 자신이 시술하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종연을 위로해 주어야 하지만 이제껏 행동한 패턴대로 붙어보기도 전에 도망쳤다.
‘무 책임하고 비겁한 사람. 그게 나다.’
손임은 방을 나가는 종연을 바라보며 자신을 질책했다.
무조건 싹싹 빌고 종연이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줘야 한다.
손임은 누구보다 종연을 사랑하고 지금 이룬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고 싶지만 주도적으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나 생각해 보았다.
손임 인생의 한 컷, 한 컷에 종연은 늘 적극적으로 손임 곁을 지키고 함께하는 소중한 배우자였지만 손임은 그런 종연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표현하지 않았음에 갑자기 목이 매였다.
손임은 단단히 마음먹고 사과하고 위로해 주기 위해 종연에게 갔다.
종연은 배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손임은 자신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울고 있는 종연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상하다.
종연의 발목까지 피가 가느다랗게 늘어져 있다.
종연은 아파서 울었던 것이다.
“자기야. 무슨 일이야? 피나는 거야?”
종연은 방에서 나간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었다.
종연이 흐느끼며 말했다
“아랫배가 아프고 계속 생리할 때처럼 피가 나와.”
손임은 당장 종연과 병원에 갔다.
치타공 병원은 사람이 많고 대기 시간도 길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관대해서 대체적으로 현지인들보다 먼저 진료해 주는 친절을 베풀어 준다.
종연도 외국인 배려를 받아 바로 초음파를 볼 수 있었다.
의사가 말했다.
“혈액 수치가 정상 수치에서 상당히 많이 떨어져 있네요.
임신 4주 5일이지만 지금은 유산이 진행 중입니다. 유감입니다.”
원치 않는 아이인 걸 이 작은 아기가 눈치챈 건가?
종연은 죄책감에 눈앞이 흐려졌다.
손임이 의사에게 생각 나는 대로 종연의 상태를 물어봤다.
“산모가 피를 많이 흘리는데 괜찮나요?
그리고 유산의 원인이 있나요?”
의사는 당연한 듯 대답했다.
“유산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자궁 내벽에서 피가 나는 겁니다.
이 부분이 피가 고여 있는 곳이에요.
유산의 이유는 많겠지만 스트레스와 노산이 주요한 원인이 됩니다.
약물 중절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우리나라와 달리 소파 흡입술로 수술대에 오르는 것보다 약물을 복용하여 중절하는 절차를 선호한다.
손임은 멍한 종연을 부축해서 처방받은 약을 구입했다.
종연은 물론 손임도 계속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임은 중절 약을 먹은 후 산모가 겪을 후유증과 통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자신이 아내에게 지워버린 짐 보따리의 엄청난 무게에 너무 괴로웠다.
중절을 위한 약물은 매우 센 호르몬 농축제로, 억지로 자궁을 수축시켜 아기집을 떼어내 중절시키기 때문에 약을 복용하고 3~4일간 하혈과 동시에 상당한 통증도 동반된다.
손임은 3일 간 휴가를 내고 종연을 극진히 간호하고 아이들을 케어했다.
종연의 부재로 손임은 종연이 이끌어 온 가정의 소중함을 알았고 지난날의 무심함을 반성하게 됐다.
한편 종연은 우울의 심해에 가라앉아 있다.
비록 반가운 임신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찾아온 생명이 한순간 핏덩이로 사라지게 되니 종연의 정신적 타격은 생각보다 심했다.
약을 복용하고 일주일 동안 종연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어두운 바닷가에서 잃어버린 아기를 찾는 꿈을 계속 꿨다.
종연은 이제 와서 자신에게 사과하고 돌아선 손임을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아기가 생기고 잃은 모든 과정 속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손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연은 아빠 장례식 후 남원 법률 사무소에서 출력한 이혼 서류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