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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30. 2024

알바 하면서 알게 된 것

돈의 소중함에 관하여

20살이 되고, 지금까지 2년 동안 같은 곳에서 알바를 해왔다. 대형마트에서 술병 진열과, 2~3 빠레트씩 오는 주류 물류를 정리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상품을 폐기해야 하는 업무이다. 하지만 2년 동안 같은 업체에서 몸담은 것은 아니다.
  
첫 해는 ‘좋은데이’소주를 파는 ‘무학’에서, 2023년과 2024년은 ‘하이트진로’라는 곳에서 소속되어 홈플러스에서 1달 동안 8시간 씩 일하는 식이었다.
더구나, 홈플러스는 아버지가 몸담던 회사였고, 내가 하던 일은 원래 형이 2년 동안 해왔던 일이었다. 그러나 형이 3수를 실패하고, 재수 때 합격한 대학으로 복학하게 되어 진주로 자취하게 되어 이 일을 나에게 물려주게 되어 내가 맡게 되었다.
  
형은 그만둘 당시 좋은데이와 하이트진로를 둘 다 하고 있었으나, 영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학 일만 맡게 되었다. 하이트진로는 사촌 형이 이어받았다.
2022년 설 이후부터 한 달 동안 인수인게가 시작되었다.
‘L카’끄는 법부터, 물류를 옮기는 ‘쟈키’ 다루는 법, 물건 채워 넣는 법과 회사에 보고하는 방법까지 속전속결로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계해야 할 경쟁사를 대하는 법 까지 나에게 알려주었다,
형이 친절하게 하나하나 떠먹여 주니 금세 적응해 갔다. 어떤 날에는 맥주 페트병 하나를 터뜨리는 시행착오를 겪어왔으나 무사히 인수인계를 잘 마치고 3월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 혼자 형이 알려준 대로 홈플러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첫날은 진열장 사진을 찍어서 보고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아직 보고 올리는 단톡방에 초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얼마 뒤에 단톡방에 초대되어 정상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3~4시간 동안 꾸준히 근무했다. 주어진 증정용 라면과 땅콩이나 물티슈를 보이는 대로 붙였다.
초반에는 아버지의 보살핌과 점장님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잘 해냈다.

7월에, 아버지가 진주점으로 발령 나셨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아버지는 멀리 계셨지만, 평소대로 일을 열심히 하다가도 집중력이 흩트려지는 둥 온갖 핑계를 대며 일이 따분해지기 일쑤셨다.


나 자신과 10분 쉬기로 했는데 오랜 시간을 쉬다가 과장님께 혼이 난 적이 두세 번 있었다. 그런 상황이 또 오지 않기 위해서 그날부터 나는 눈치껏 일하고 눈치껏 쉬는 그런 기술을 스스로 터득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총 60분 중에 15분 쉬고 45분 일하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른 이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내 나이대의 사람들과 한 번도 일해보지 못했지만….(내가 일하고 있는 홈플러스는 직원들이 50대로, 죄다 부모님 뻘이다.)


개미는 배짱이가 되면 안 되었다. 개미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개미가 되려고 더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다시는 배짱이 시절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일하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돈의 소중함이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일하기 전까지 나는 내 수중에 돈이 쌓이는 꼴을 못 보았다. 돈은 쓰라고 있는 거지, 모으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특성을 아는 엄마는 항상 중학교 2학년까지 한 달 용돈 5천 원만 내 손에 쥐어주셨다가 나의 낭비벽이 점점 심해지자 아예 6년 동안 용돈을 끊으셨다.


기본적인 문구류나 생필품은 어린애같이 엄마가 사다 주셨다. 나는 그게 싫었지만, 그런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스무 살이 되면서 일을 시작하니 40만 원이 내 통장으로 들어왔지만 그 전액을 엄마에게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 낭비벽을 고치기까지는 한 푼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나는 일을 하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나는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 벌을 엄마가 내리신 지 6년이 다 돼가도록 말이다. 나는 어서 빨리 용돈을 다시 주길 바라는 못 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했던 생각들 모두 모두 나의 과오이자, 잘못이었다. 엄마에게 신뢰가 가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내가 바뀌지 않으면 엄마도 영원히 용돈을 나에게 맡기지 않을 터였다.


남들은 스무 살이 될 때 용돈관리를 직접 한다. 그들은 낭비벽이라는 증상이 없다. 나처럼 자전거를 한 대 사겠다고 하고 돈이 조금만 모여도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함부로 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증상이 심했다. 수중에 돈이 단 1천 원만 주어져도 어린아이 같이 그 모든 돈을 먹는 데 탕진했다.

이러다가 남들은 20대 후반에 첫 청약을 할 때, 나는 여전히 아이같이 얹혀살아야 할 터이다. 80대에 첫 청약을 하거나 영원히 내 명의로 된 청약통장 하나 못 가지고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변해야만 했다.
그날부터 매일같이 나가는 일에 주문을 걸었다.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은 그냥 오지 않는다. 내가 뼈 빠지게 번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돈은 쉽게 쥐어지지 않으며, 피 터지게 고생한 사람만이 얻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하면서 되뇌었다.


그렇다. 돈을 벌고 있는 입장이라면 돈을 소중하게 다룰 줄 알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 나의 경제관념을 키워야만 했다. ‘생떼’ 부리는 나의 욕구를 절제하고, 그것을 엄하게 다스려야만 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
  
순간 엄마가 매일 같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네가 먹은 것이 곳 네가 된다. 너는 음식으로 망할 거다.” 이 말은 사실이다. 백번 옳은 말씀이다. 정말로 내가 돈을 해롭게 여기면 내가 사 먹은 아니, 내가 음식을 낭비하는데 쓴 돈 앞에 처참히 무너질 것이라는 엄마의 경고를 새기고 오늘도 새겼다. 물론 지금도 고치는 중이므로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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