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기회의 도시였다. 나는 부산 토박이이지만, 늘 서울을 동경해 왔다. 눈이 부실 듯 높은 마천루들이 즐비한 도심, 시청 앞 낭만 가득한 야외도서관, 600년 전통과 멋이 살아 있는 각종 문화유산, 서울을 상징하는 푸르게 높이 솟아 오른 인왕산과 북악산, 관악산이 있는 대한민국의 뜨거운 심장…. 더군다나 부산에 비해 일자리가 흘러넘치는 서울은 나에게 있어서 기회의 땅이었다.
내가 서울을 처음 갔을 때는 2살 때인 2004년이었다. 아주 어릴 때라 기억이 하나도 없지만, 엄마의 증언으로 한약을 타기 위해 그 당시 휘황찬란했던 고속철을 타고 갔으리라…. 그때 서초동에 있는 ‘해마한의원;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 13년 뒤인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랑 갔다. 한참 예민할 때 본 서울은 마치 부산이 ’ 시골 깡촌‘같이 느껴질 정도로 번화했다. 특히 남산 근처 남대문 시장과 남산이 그랬다.
일단 남산타워가 있는 남산의 자락에는 산길을 따라 돈가스집이 늘어져 있었다. 거기서 돈가스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남산타워를 둘러보고 경복궁을 둘러본 뒤 숙소에서 쉬다가 남대문 시장에 족발을 먹으러 갔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무궁화호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도 나는 서울에 계속해서 가고 싶었다. 아무래도 지하철 노선 수가 많다 보니 그랬을 수도 있었다. 내가 지하철을 좋아하고, 서울 가서 지하철을 많이 타볼 수 있으니까 서울을 ’ 기회의 땅‘이라고 그랬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환상은 올해 6월 즈음에 깨졌다. 서울을 2번 가보니 그 환상은 착오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올해 5월 아버지가 진주에서 서울 끝자락인 중랑구의 한 홈플러스 매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우리 가족은 서울을 자주 가게 되었다. 만약 내가 휴학을 했다면 아예 서울로 가서 살 터였다.
정말 신기했다. 22년 동안 살면서 단 두 번 갔던 서울을 올해만 6번 넘게 오갔다. 아버지도 2주마다 내려오셨다.
그러다 보니 부산에서 우리의 외식 장소도 명지에서 부산역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서울에 갔을 때 지하철을 타고 종로, 신촌, 동대문 등 서울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반면, 날이 너무 더운 날에는 차를 4~6시간 빌렸다,
막상 서울 이곳저곳 둘러보니 내가 사는 부산과 별 차이가 없었음을 체득했다. 단, 서울은 지하철 노선만 복잡한 동네였을 뿐이었다. 도시의 풍경은 부산과 비슷했다. 다시 말해 서면과 남포동이 각각 5곳이 있는 동네였다.
그리고 서울을 여행할 때마다 어려움을 느꼈다. 특히 맛집을 찾기가 어려웠다. 식당 웨이팅만 3시간 넘게 했고, 간신히 들어간 가게에 인근 경찰서에서 경찰 단체손님이 들어와 한참 기다렸다.
구경삼아 갔던 동대문 시장에는 강아지를 키우는 정육점이 ‘개고기’를 팔고 있어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리고 커피를 먹으려는데 행동이 나무늘보 같은 아르바이트생의 무책임 함과 불친절한 행동에 몹시 화가 났던 적도 있었다.
서울에서 여러 경험을 하고 나니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제 ‘서울 드림’의 ‘시옷’자도 꺼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말해 서울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하철 또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버스같이 심하게 흔들렸고, 승차감도 별로였다.
그러나 고속철을 타고 부산역으로 돌아왔을 때 정겨운 바다 비린내가 나를 반기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반가움에 울컥했다. 이렇게 바다 내음이 반가울 수가!! 이 순간만큼은 부산. 내 고향이 너무 좋았다. 그때 기억나는 노래가 윤시내의 『부산 찬가』이다. 이 노래를 기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다운로드하여 그 감정에 곁들여 음미해 본다….
이때 생각나는 말이 있다. “집 나가봐야 개고생 한다.”아무리 그토록 좋은 서울에 가도 불친절하고 더러운 경험 때문에 정겨운 바다내음이 나는, 험준한 산복도로에 버스가 쌩쌩 달리는 부산이 그리워진다는 대목이다. 엄마가 부산역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부산이나 서울이나 똑같제? 그래. 사람은 늘 자기가 살던 곳에 발붙여 살 때가 가장 행복한 거야!”
번외로 서울에서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연도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운전할 때만큼은 신사나 숙녀의 마음가짐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한 번은 강변북로를 지날 때 우리 렌터카가 3차선으로 진입을 해야 했는데, 차들이 너무 많아 안절부절못했던 찰나에 연세가 50대 후반 되어 보이는 노신사께서 우리 보고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우리는 너무 고마워서 냉큼 들어왔고, 네 번 동안 깜빡이를 틀었다. 그러나 깜빡이 네 번으로는 부족해서 내가 그 노신사분께 손하트를 미소 지어 날려 보냈더니, 그분께서도 손하트를 건네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스갯소리로 그 노신사는 일부러 차들 넣어주려고 나온 것이 아니냐는 말장난을 쳤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노신사를 못 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