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패키지여행을 가보면 "인원이 이렇게 많아도 되나?"싶은 순간이 많다. 특히 56인승 대형버스에 기사님 가이드 그리고 인솔자를 제외하고 53명이 꽉 들어찬 모습을 보면 "이렇게 많은 인원이 여행하는 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패키지여행이다.
사실 예전엔 미국으로 관광을 가려면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있어야 미국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인터뷰에 떨어지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미국비자였다.
그러나 우리의 우방국이자 세계최강대국 미국을 가보고 싶어 하는 분들의 바람이 커서일까 2008년 11월부터 ESTA (미국의 전자여행 허가제)가 도입되면서 이제는 전자여권과 간단한 서류절차만 거치면 누구나 미국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오랫동안 미국을 여행하고 싶었던 분들이 한꺼번에 몰리며 인솔자들의 미국출장 또한 빈번하게 됐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었다.
50개 주로 이루어진 미국의 넓은 땅을 이동하기 위해서는 긴 이동시간을 피할 수 없었고버스에서의 자리 배치는 작은 전쟁일뿐 아니라 앞자리 쟁탈전은 불가피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될만한 건 바로 화장실이었다.
유럽과 달리 미국의 투어버스는 앞쪽에만 문이 있다. 따라서 맨 앞에 앉으신 손님들은 화장실을 1등으로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야말로 로또당첨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이유로 손님들이 앞쪽자리에 앉기 위해출발 1시간 전부터버스 앞에줄을 서는 해프닝도 비일비재했다.
그날도 해외여행이 처음이신 것같은나이가 지긋하신 부부가 첫날부터 버스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으셨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달라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평생을 농사만 지으며 고생한 아내를 위해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왔습니다. 아내가 무릎이 좋지 않아 걷는 것이 불편하니 앞자리에 앉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
53명의 손님들은 모두 다 박수로 동의를 해주셨고 그때부터 어머님의 특혜는 시작되었다.
처음온 해외여행이지만 일단은 남편이 멋진 분임을 만천하에 알렸기에 모든 어머님들의 부러움을 사셨으며 관광지마다 맨 먼저 내리 실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셨으니 두 분의 첫 해외여행은 그야말로 대만족의 여행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문제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졌다.
미서부관광 중 손님들의이탈방지를 위해 가장 긴장해야 할 곳이 바로 라스베거스이다.
낮에 도착한 라스베거스는 말 그대로 죽은 도시라 착각할 정도로 적막하고 칙칙하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앞으로 밤에 닥칠 화려한 네온사인의 쓰나미에 대비한 휴식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게다가 수천 개의 객실을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명성을 가진 카지노 호텔들은 잠시나마 나 자신이 잭팟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꿈을 꾸게 한다.
따라서 손님들은 다른 지역보다 조금은 더 흥분될 수 있고 어느 곳보다 복잡한 라스베거스에서 53명의 인원이 함께 움직인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일어날 일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라스베거스의 저녁식사는 보통 한식을 제외하고는 카지노호텔 안에 있는 대형 뷔페식당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몇천 개의 객실로 이루어진 카지노호텔에서 식당으로 이동하는 것은 미로 속을 걷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길을 잘 아는 가이드를 잘 따라가야 함은 기본이며 53명의 손님들이 이탈 없이 따라가실수록 맨뒤에서 살펴야 하는 인솔자의 업무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평상시 맨 앞에 앉으셨던 두부부를 선두로 53명의 우리 일행은 3500여 객실이 있는 복잡한 카지노호텔에 식당에 무사히 도착하셨고 라스베이거스의 저녁식사는 여느 때처럼 즐거웠다.
그런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손님들과 함께 버스로 돌아온 나는 모든 분들의 부러움을 산 맨 앞자리 두 좌석이 비어있음을 알게 됐다.
게다가 가이드분과 인솔자의 연락처가 적혀있는 여행일정표가 두 분의 좌석앞자리에 꽂혀있었다.
즉 두 분은 비상시에 연락할 연락처를 두고가 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로밍은커녕 한국에서 아예 핸드폰을 가지고 오시지 않은 두 분이었는데도대체 어디서 두 분을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국제미아가 되실지 모를 두 분을 생각하니 걱정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분명히 난 53명의 일행 맨 뒤에서 왔고 가이드님은 식당에서 나온 손님들을 이 열 종대로 맞추고 53명이라는 인원까지 확인하고 출발한 게 분명한데 두 분이 중간에서 이탈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됐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던 길을 되짚어 다시 가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도록 카지노식당 근처를 뛰어다니며 두 분을 불러보았지만 두 분의 모습은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고이제 선택의 여지없이 두 분을 찾기 위해 경찰서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작은 목소리지만 내가 아는 목소리가 분명했다.
애써 태연 한척하고 있지만 부부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대~ 한~ 민~ 국"
내가 그리도 찾아 헤매던 두 분이었다.
분명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 맞지만 나와 가이드는 긴장이 풀리며 웃음이 나왔다.
이것으로 라스베거스 실종사건은 해피앤딩으로 막을 내렸다.
1시간이 넘게 버스에서 걱정하고 기다려준 나머지 손님들과의 재회 후 호텔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두부부의 무용담이 펼쳐졌다.
두 분이 사라지신건 단순한 이유다.
평사시와 다르게 맨 앞이 아닌 조금 뒤처져서 가시던 두 분은 책팟터지는 함성소리가 신기해 그걸 보러 일행에서 이탈한 것이었다.
그런 두 분을 맨뒤에서 인솔자가 살피기에는 너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두 분 역시 본인들이 이 사태를 파악한 뒤 우리 일행을 찾으려 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또한 일행을 놓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가이드나 인솔자를 빨리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일행을 찾는다고 계속 이동하신 것이 더 큰 사태로 번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두 분에겐 불현듯 2002년 월드컵이 생각났고 " 대한민국"이라고 외치고 있으면 누군가 도와 즐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셨다고 했다. 놀랍도록 기막힌 발상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 덕분에 두 분은 국제 미아가 되는 걸 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