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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겔 Oct 21. 2020

살아지다 사라지다

'살아지다 사라지다'라는 문장을 구글에 검색해보니 누군가가 이미 자신의 작품이나 글 제목으로 사용한 것 같다. 아쉽다. 이번에도 내가 생각하기에 번뜩이던 그 아이디어는 이미 누군가가 남긴 발자국과 같았다. 저 문장은, 내가 처음인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한 표현 중에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말이다.


약간의 아련한 기운이 있다. 대략 반 정도 부스러진 늦가을의 낙엽을 알 것이다. 참나무 종류의 낙엽이 적당하다. 흙내음이 날 것만 같은 빛바랜 갈색 낙엽이 바스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사르륵 흩어지는 듯이 부스러지는 그 형태 또는 소리, 아니면 느낌. 그것과 닮아있다.


또는 군 시절 초소에서 새벽 근무를 마치고 복귀한 막사 앞에서 꼬나문 담배 한 개비, 거기서 피어오르는 허옇고 뿌연 담배 연기와도 비슷하다. 산골의 막사라면 더더욱 좋다. 밤동안 정체된 공기가 습기를 머금어 연기가 진하게 피어오른다. 막연함에 툭 뱉은 한숨의 농도에 따라 진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깐 머무는 듯 몽글거리며 시선을 빼앗는다. 그리고 이내 가로등을 가로질러 서서히 흩어져 버린다.


늦은 오후 창가 너머로 쏟아지는, 뉘엿뉘엿 넘어갈까 말까 준비 중인 햇볕과 같기도 하다. 황금빛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오후 5시 즈음의 하늘.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가을의 햇볕이면 그 느낌에 더욱 가깝다.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이 초라하거나 쓸쓸하거나 가엽거나 자신없거나 불쌍하거나 해서, 어느 곳도 나가지를 못하고 누구 하나 만나지를 못하는 그런 마음일 때 방 안에서 바라보는 그런 햇살이다. 그저 부서지는 가을 햇볕이 감격스러워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그 감격스러움에 눈이 시큰거려 비비고 말았을 때, 슬슬 어둑해지는 방 안에 혼자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면 점차 햇빛이 희미하다. 곧이어 방 안은 손조차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잠기고 창 밖은 마지막 불빛처럼 타오른다.


살아지다 사라진다는 것은 나에게 그런 의미이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가꾸는 것이 아니라 삶이 수동적으로 굴러가는 것.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저 그렇게 두고 있는 것. 내 자아가 나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목숨이 나를 살게 하는 것. 그래서 나는 살아지다 사라지고 싶지 않다. 살아지다 사라지는 것은 개인적으로 비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라지더라도 살아가다 사라지도 싶다. 만약 살아지다 사라진다면, 사라지는 순간 나는 나에게 어떤 감정을 가질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무런 감정이 없거나 미안한 감정을 가질 것이다. 다만 지금 나에게 분명한 점은, 그 순간을 상상했을 때 두 가지 경우 모두 나를 매우 슬프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살아지다 사라지고 싶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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